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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장애인 개인예산제, ‘선택의 자유’인가 ‘행정의 굴레’인가
최근 시작된 ‘장애인 개인예산제’ 시범사업은 장애인 가구에 한 줄기 빛과 같다. 국가가 일방적으로 정해준 서비스 틀에서 벗어나, 장애인 당사자와 가족이 꼭 필요로 하는 곳에 예산을 쓸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다. 필자 역시 이 제도 덕분에 평소 엄두도 내지 못했던 자녀의 ‘휠체어 슬로프 설치’를 드디어 계획해볼 수 있었다. 아이의 이동권을 보장해줄 수 있다는 기대감에 정책의 취지에 깊은 감사를 느꼈다.
하지만 설레는 마음으로 설치를 준비하던 중 현행 결제 시스템의 높은 문턱 앞에 멈춰 서게 되었다. 약 800만 원에 달하는 슬로프 설치 비용을 일시불로 결제하겠다고 하니, 행정 기관에서는 월별 배정된 예산 한도를 초과한다는 이유로 “안 된다”는 답변을 내놓았다. 정책이 주는 혜택을 온전히 누리기 위해서는 오히려 사용자가 불합리한 선택을 감수해야 하는 상황이다.
사용자가 마주한 선택지는 두 가지다.
첫째는 ‘강제된 할부’다. 월 예산 범위에 맞추기 위해 고가의 장비를 억지로 쪼개어 결제해야 한다. 이 과정에서 발생하는 상당액의 할부 수수료는 고스란히 장애인 가구의 몫이다. 장애인의 권리를 보장하겠다는 좋은 취지의 제도를 이용하기 위해, 개인이 내지 않아도 될 금융 비용까지 부담하며 ‘빚’을 지고 시작해야 하는 모순이 발생한다.
둘째는 ‘기약 없는 기다림’이다. 매달 예산을 쓰지 않고 몇 달간 모아야 하는 ‘이월’ 방식이다. 이는 당장 슬로프가 필요한 아이에게 “행정 절차상 돈이 모여야 하니 몇 달만 더 집 안에 갇혀 있으라”고 말하는 것과 같다. 장애인의 편의는 시급성을 다투는 일임에도, 행정 시스템의 칸막이가 그 일상을 멈춰 세우고 있다.
장애인 개인예산제가 진정한 ‘희망의 사다리’가 되려면 결제와 정산 방식의 유연함이 반드시 병행되어야 한다. 전용 카드를 도입해 고가 물품에 대한 무이자 할부를 지원하거나, 예산 총액 범위 내에서는 일시불 결제 후 사후 정산이 가능하도록 시스템을 개선해야 한다. 또한 카드사와 협력해 복잡한 할부 증빙 서류를 간소화하는 노력도 절실하다.
개인예산제는 장애인의 삶을 스스로 설계하게 돕는 훌륭한 제도다. 필자가 느꼈던 그 첫 감사함이 실망으로 바뀌지 않도록, 시범사업 기간 동안 현장의 목소리를 세밀하게 담아내길 바란다. 800만 원짜리 휠체어 슬로프 앞에서 수수료를 계산하며 한숨 짓는 부모가 없는 세상, 그것이 이 제도가 지향해야 할 진짜 목표일 것이다.
*이 글은 독자 고현정 님이 보내온 글입니다. 에이블뉴스는 언제나 애독자 여러분들의 기고를 환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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