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애인의 건강권은 헌법과 복지법률로 보장되어 있음에도, 현실에서는 여전히 ‘이용할 수 없는 권리’에 머물러 있다. 병원이 있어도 갈 수 없고, 진료실에 도착해도 치료를 받지 못하는 상황이 반복된다. 이는 단지 예산이나 의료인력 부족의 문제가 아니라, 우리나라의 의료체계가 비장애인을 전제로 한 표준화된 시스템으로 설계되어 있다는 구조적 문제에 기인한다.
오늘날 장애인의 미충족 의료는 곧 제도의 부족함을 드러나는 지표이자, 권리 보장 실패의 신호이다.
‘의료 미충족(unmet healthcare needs)’이란 개인이 건강 문제를 인식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필요로 하는 의료서비스를 적절한 시기에 이용하지 못하는 상태를 의미한다. 이는 단순히 병원에 가지 않았다는 것이 아니라, 의료서비스 이용의 수요와 실제 이용 간의 간극을 지칭한다.
다시 말해, 병원이 있어도 갈 수 없고, 치료가 필요하지만 받지 못하며, 건강이 악화되고 있음에도 아무런 조치를 취할 수 없는 상태가 바로 의료 미충족이다.
의료 미충족은 다음과 같은 유형으로 구분될 수 있다.
경제적 미충족: 치료비·진료비 부담, 건강보험 비보장 영역의 과중한 비용.
지리적·물리적 미충족: 병원이 멀거나, 교통 수단 부족, 병원 건물의 물리적 접근성 부족.
정보·의사소통 미충족: 병원에서 장애 유형에 적절한 의사소통 수단(수어, 점자, 음성 등) 미비.
제도적 미충족: 의료 인프라 부족, 의료인의 장애 인식 부족, 진료 거부·기피.
심리적 미충족: 이전에 차별을 겪은 경험으로 인한 병원 회피 또는 의료 불신.
이러한 의료 미충족은 단지 개인의 불편이나 선택의 문제가 아니라, 의료 접근성과 건강권이 실질적으로 보장되지 않은 구조적 배제 상태를 뜻한다. 특히 장애인은 위의 모든 유형에서 복합적으로 의료 미충족을 경험할 가능성이 높으며, 이는 곧 건강형평성의 심각한 훼손으로 이어진다.
통계가 말하는 ‘의료배제의 현실’
보건복지부의 '2020년 장애인실태조사'에 따르면 전체 장애인의 17.2%가 최근 1년 이내에 필요한 진료를 받지 못한 경험이 있다고 응답했다. 이들이 진료를 받지 못한 주요 원인은 경제적 부담이 39.8%로 가장 높았고, 다음으로 이동의 어려움이 27.1%, 시간 부족이 15.6%, 의료진의 장애인 차별이 7.8%로 나타났다. 의사소통 문제를 겪은 사례도 3.4%에 이른다. 특히 중증장애인, 고령 장애인, 농어촌 거주 장애인의 경우 의료기관 접근성 문제와 실제 진료 거부까지 경험하는 경우도 적지 않다.
또한 '2022년 장애인 건강보건통계'는 장애인의 건강 상태와 의료이용의 불균형을 더욱 명확히 보여준다. 장애인의 고혈압 유병률은 39.5%, 당뇨병 유병률은 20.4%로 비장애인보다 높았지만, 국가건강검진 수검률은 59.1%로 비장애인(76.4%)보다 크게 낮았다. 즉, 장애인은 건강 문제가 더 많지만 필요한 진료는 덜 받고 있는 구조적 건강 불평등 상황에 처해 있는 것이다.
건강형평성(Health Equity)의 관점에서 본 문제
이러한 상황은 단순한 ‘건강의 차이’가 아니라, 건강형평성의 결여로 해석해야 한다. 건강형평성이란 모든 사람이 건강을 유지하고 회복할 수 있도록 공정하고 차별 없는 조건을 제공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는 단순히 누구나 병원에 갈 수 있는 ‘형식적 평등’이 아니라, 개인의 신체조건, 사회적 위치, 환경적 제약 등을 고려한 실질적 접근의 평등을 말한다.
장애인의 경우, 신체 기능의 제한 외에도 이동권, 정보 접근, 소득 수준, 차별 경험 등 복합적인 요소들이 건강서비스 이용을 가로막고 있다. 따라서 단순히 의료 접근을 ‘동일하게’ 제공하는 방식은 건강형평성을 보장하지 않는다. 비장애인과 같은 조건으로 병원에 갈 수 없는 이들에게는 보다 정교하고 집중된 지원이 필요하며, 그것이 곧 공정성의 실현이다.
이와 같은 관점에서 보면, 현재 한국의 의료정책은 장애인을 단지 ‘비장애인과 똑같이 대우’하는 데서 멈추고 있다. 그러나 진정한 형평성은 불리한 조건에 처한 이들을 우선적으로 고려하고, 필요한 자원을 더 투입하는 방식으로 작동해야 한다.
제도는 있으나 현실은 멀다
우리나라 정부도 2018년부터 ‘장애인 건강주치의 제도’를 도입해 장애인의 주기적 건강관리를 목표로 하고 있다. 그러나 2023년 기준 이 제도에 참여하는 의료기관은 전국에 85개소에 불과하며, 지역 불균형이 심각해 실제로 이 제도를 이용할 수 있는 장애인은 극히 제한적이다.
보건복지부는 또 다른 대안으로 ‘장애친화 건강검진기관’ 확대를 추진하고 있으나, 2024년 기준 설치 완료 기관은 51개소 수준이며 대부분 수도권에 집중되어 있다.
방문진료 제도 역시 시범사업에 그치고 있으며, 중증장애인이나 도시 거주 독거 장애인의 경우, 방문 진료를 신청하더라도 연 1~2회 수준으로 제한되며, 의료인이 부족하거나 비용 대비 인센티브가 낮아 방문 자체가 어려운 경우가 많다. 제도는 존재하지만, 이용할 수 없는 것이 지금의 현실이다.
해외는 어떻게 형평성을 실현하고 있는가?
EU, 미국, 캐나다 등은 모두 ‘건강권’을 단지 의료서비스 이용 여부가 아닌 형평성의 문제로 접근하고 있다. 유럽연합은 장애인의료 접근성과 차별을 완화하기 위해 '장애인권리전략(2021~2030)'을 수립했고, 모든 회원국에 병원 접근성 점검 시스템을 도입하고 있다. 미국은 ADA에 따라 진료실 접근, 수어통역, 의료 정보 제공을 의무화하였으며, CDC 보고서(2023)에 따르면 장애인의 의료 미충족률은 35.9%로, 비장애인의 세 배에 달하는 수준이다. 캐나다는 병원 공간 설계, 점자 안내, 의료진 교육을 포함한 'Accessible Canada Act(2019)'을 통해 장애인 환자의 실질적 접근권을 보장하고 있다.
이러한 나라들의 공통점은 의료 접근성 보장을 단순한 행정적 과제가 아닌, 인권 기반 접근과 법제화된 의무로 다룬다는 점이다.
제도 개선을 위한 과제 '형식적 평등에서 실질적 형평성으로'
장애인의 건강권을 보장하고 건강형평성을 실현하기 위해서는 몇 가지 정책적 변화가 필요하다.
첫째, 건강권 보장을 위한 별도 법제화가 시급하다. 진료 거부 금지, 정보 접근성 보장, 의료 인력 의무 교육 등은 선언적 규정이 아닌 강행 규정으로 법제화되어야 한다.
둘째, 의료 인프라는 단순한 물리적 공간을 넘어, 정보·의사소통·대기 시스템의 통합적 접근성을 갖추도록 설계되어야 하며, 유니버설디자인이 적용된 진료환경이 기본이 되어야 한다.
셋째, 모든 의료인에게 장애 감수성 교육을 의무화하고, 장애 유형별 진료 가이드를 표준화하여 진료의 질을 확보해야 한다.
넷째, 건강주치의 및 방문진료 제도는 지역별 격차를 고려하여 장애인이 있는 곳에 의료가 도달하도록 구조를 전환해야 한다. 이를 위해 지자체 중심의 커뮤니티 기반 건강센터, 장애인 전담 사례관리자 제도 등 지역 밀착형 전달체계를 강화해야 한다.
‘누구나 병원에 갈 수 있다’는 말이 진실이 되기 위해
장애인의 건강권은 법률의 조항이나 정책의 문서에만 머물러 있어서는 안 된다. 그것은 병원까지 갈 수 있는 교통수단이 마련되어야 하고, 진료실 안에서 나의 말을 통역해줄 사람이 있어야 하며, 의료진이 나를 동등한 환자로 받아들일 수 있어야 비로소 실현된다. 그리고 이 모든 조건은 장애와 비장애의 차이를 고려할 때에만 형평성의 이름으로 가능해진다.
이제는 선언이 아니라 실천이 필요하다. 장애인이 치료받을 수 있는 권리는 곧 건강형평성의 바로미터이며, 그것은 정책과 예산, 설계와 교육을 통해 실현되어야 한다. 누구나 아플 수 있고, 누구나 치료받아야 한다. 의료는 권리이며, 국가는 그 권리를 실질적으로 보장할 책임이 있다.
출처 : 에이블뉴스 https://www.ablenews.co.kr/news/articleView.html?idxno=22097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