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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외부칼럼]③2010년 장애인당사자의 핵심 키워드 2010년 장애인정책
2010-12-22 14:53:00
관리자 조회수 22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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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 장애인당사자의 핵심 키워드, 무한절망!

키워드를 통해 돌아본 2010년 장애가(街)  

안진환(장애인사회연구소장)

매년 이맘 때 쯤이면 어김없이 한 해 동안 장애계를 들끓게 했던 갖가지 정책들과 사건들을 되짚어보게 된다. 물론 다사다난했던 한 해를 돌아보는 일은 장애계 말석에서 일하는 우리로써는 당연한 것인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어느 해 보다도 올해의 연대기를 새삼스럽게 꼼꼼히 톺아보고자 하는 이유는 장애계를 온통 설렘과 혼란, 그리고 어쩔 수 없는 절망감에 사로잡히게 했던 굵직굵직한 사실들이 유독 많았던 탓이다.

이 글은 속절없이 무너진 2010년 한 해의 장애인복지정책을 되돌아보는, 그러나 설레고 슬퍼하며 분노했던 순간의 기록이 아니었으면 좋겠다. 소용돌이쳤던 감정의 질곡 속에서도 오롯이 남아 있던 반성과 성찰의 흔적이었으면 한다.

⑦ 국가인권위원회 정체성 훼손

올해로 인권위 출범이 9년이다. 한나라당으로 정권이 교체되면서 예견된 일이기도 했지만, 2009년 4월부터 속도를 내기 시작한 ‘인권위 능멸 작전’은 지금도 전방위적으로 이루어지고 있다. 이명박 대통령 당선 직후 대통령직 인수위원회가 국가인권위원회를 대통령 직속기구로 만들겠다는 방침을 발표하자, 인권시민단체들은 강력하게 반발하며 명동성당에서 한겨울 노숙농성을 진행했다. 유엔인권최고대표부마저 한국의 국가인권위원회 독립성 훼손을 우려하는 공개 서신을 보냈고 국제 인권단체들 역시 깊은 관심을 보이며 국가인권위원회가 대통령직속기구로 전락해서는 안된다는 입장을 발표했다.

그러나 인수위원회는 국가인권위원회의 대통령직속기구화 방침을 철회하는 대신에 국가인권위원회 조직을 21% 가량 축소해 활동을 위축시켰다. 그리고는 급기야 평생 ‘인권활동’의 문외한인 현병철씨를 위원장에 앉혔다. 적잖은 사람들이 “친일파의 후손에다 연구 실적이 전혀 없고 그나마 몇 편의 논문도 중복 게재나 표절이다. 인권 분야 활동 경력 전무하다”는 등의 부정적 평가를 쏟아냈다.

부정적 평가에 부응이라도 하듯 현병철 위원장 취임 이후 국가인권위원회는 파행을 거듭하며 좀비기구, 식물위원회, 고사(枯死)위원회 등으로 희화화되며 정부 눈치나 보는 기관으로 전락했다. 현 위원장의 숨겨진 모습도 하나둘 드러나기 시작했는데, 합의제 기구 파기, 월간 업무보고 폐지, 상임위원의 의안제출 권한까지 봉쇄하기에 이른다. 심지어 현 위원장 자신은 ‘깜둥이, 독재, 행정부 조직 인정’ 등 귀를 의심할 정도의 상식 이하 발언을 서슴지 않고 있다. 이런 사람에게 대한민국 인권의 사령탑을 맡기고 있으니 제기랄이다.

결국 지난 11월 1일 상임위원(유영남, 문경란)들이 물러서면서 “인권위의 추락의 바닥이 어디인지를 보았다”고 일갈했고, 야당 국회의원 41인이 현병철 국가인권위원장의 사퇴를 촉구하는 성명을 발표하고 위원장 사퇴결의안이 국회에 제출되기에 까지 이르렀다. 그러나 현 위원장은 사퇴하지 않았다. 사퇴한 이는 따로 있다. 인권위원 3명, 전문‧자문위원 61명. 334명의 법학교수‧변호사, 621개 시민‧인권단체도 악을 써봤지만 수포로 돌아갔다. 장삼이사의 마음은 어땠을까?

물론 장애계도 현병철 인권위원장의 즉각 사퇴, 국가인권위원장을 비롯하여 인권위원 인선을 위한 올바른 인선시스템의 마련, 국가인권위원회 독립성 강화를 강력하게 요구했다. 인권에는 여도 야도, 진보도 보수도 없다. 인권위가 해야 할 본연의 기능은 공권력에 대한 견제와 감시이기 때문이다. ‘공권력의 감시견’이라는 위상을 스스로 내동댕이치며 파국의 격랑 속으로 빠지게 한 꼴인데 주인인 ‘이명박의 입맛에 맞는 인권정책’만을 관철시키겠다는 의지로밖에 보이지 않는다. 꼭두각시다. 아니 주구 역할을 하겠다는 자기 고백이다.

고작 1년 5개월 만에 현병철씨가 국가인권위원회의 수장으로 있으면서, 수많은 인권활동가들과 양심들이 한걸음씩 발전시켜 온 이 땅의 인권을 단박에 땅바닥으로 곤두박질치게 할 수 있다는 사실에 도대체가 어이없고, 우리사회의 인권시스템의 허약성에 새삼 가슴이 쓰리다.

⑧ 장애인자립생활지원조례제정 움직임 확산

2000년대 들어 도농(都農)을 막론하고 전국적으로 여러 지역 사회에서 장애인 인권보장을 위한 조례제정의 흐름들이 속속 나타나고 있다. 지역에서의 입법운동은, 장애인의 요구가 당연한 권리로 인식되지 못하고 사회적 시혜 수준에서 폄하되어 온 것에 대한 새로운 인식전환일 뿐만 아니라 시민단체와 주민이 직접 나서서 장애인의 권리에 대한 구체적인 법적 근거를 마련하려 한다는 점에서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조례 제정은 기본적으로 지역정책의 입법화, 입법자와 수법자의 거리 단축, 국회의 입법 부담 경감과 법령의 보완, 창조적 입법 기능, 입법 선도 기능 등을 담당한다. 특히 주민청구에 의한 조례제정은 국가사회나 의회사회에 위임 혹은 방치해놓았던 민주주의적 ‘입법 권리의 회수’를 의미한다.

그렇다면 ‘중증장애인자립생활지원조례’ 제정의 목표는? 궁극적으로 당사자참여이다. 자립생활의 모토가 자기결정이고 자기책임이듯이 장애인과 관련된 정책과정에 주체로서 참여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리고 이를 위해 요구되는 것이 ‘거버넌스’ 즉 ‘협치(協治)’이고 더불어 당사자의 구체적 참여 구조와 프로세스의 형성이다.

6.2 지방선거가 끝나고 각 지방자치단체가 새롭게 출범을 하면서, 지역사회의 장애인들이 장애인자립생활을 지원하는 조례 제정을 위해 박차를 가하고 있다. 특히 대한민국의 수도인 서울특별시의 활약이 눈길을 끈다. 현재 전국의 16개 광역시도 중 자립생활지원조레 제정을 완료한 광역자치단체는 9개에 이르고 있는데, 서울은 자립생활지원 관련 법과 제도 정비가 전무한 실정이니 그럴 만도 하긴 하다. 자립생활을 위한 사회적지지 방식의 최우선은 뭐니뭐니해도 ‘법‧제도 정비’이기에 만시지탄의 감은 있으나 발버둥 자체에 큰 의무를 부여할 수 있겠다.

먼저 자립생활 활동가들을 주축으로 자립생활지원조례제정운동본부를 발족하며 자체적인 조례안을 내놓았고, 11월12일에는 서울시의회를 압박하여 토론회를 개최하기도 했다. 서울시의회의장 및 보건복지위원장, 서울시 부시장 및 서울시 의원 등이 대거 참석한 자리에서 자립생활지원조례제정의 당위성을 역설하며 행정부와 의회의 관심을 촉구하기도 했다.

무엇보다도 장애인자립생활지원조례제정은 장애인자립생활에 대한 지역사회의 인식 개선과 장애인당사자운동을 두 축으로 삼아 지역공동체 구축의 활성화 계기를 마련해야 한다. 이는 활동가들이 지켜야 할 최소한의 예의이기도 하고 양심이기도 하다. 장애인의 지역사회참여와 활동에 대한 공론을 점차 넓혀가고, 지역의 중증장애인 자립생활 실태조사, 활동보조서비스 추가지원, 자립생활발전기금 조성, 활동보조서비스 및 인권교육 시간 이수 의무화, 탈시설자 자립생활정착, 주거지원 등의 핵심적 내용과 가치지향적 이념을 담은 장애인자립생활지원조례 제정을 위한 ‘담대한 도전’을 즐길 때다. 자립생활 활동가들은 이미 ‘준비된 그릇’들로 보인다. 그런 점에서 대단히 희망적이다.

서울시 행정부의 환골탈태를 주문하고 싶다. 중증장애인의 보편적 권리로 자리하고 있는 활동보조서비스는 장애인자립생활에 있어 가장 기본적 조건이자 핵심적인 요구사항이다. 따라서 장애인자립생활지원 조례 제정의 현실적인 내용은 장애인의 행복과 안전 그리고 지역사회 및 전체 사회와의 상호작용을 유지하는데 기여할 수 있는 방향으로 나아가야만 한다.

정부의 정책이자 예산의 문제, 그리고 의지로 귀결될 수밖에 없는 영역이 바로 ‘지역 사회 참여로서의 자립생활 지원’인데, 활동보조서비스를 필두로 한 이런 지원은 이미 전세계적으로 포괄적으로 사용하는 정책이다. 2010년 현재 대상인원 3만명에 총 1,347억 정도를 배정하고 있으니 여전히 협소하지만 어느 정도 기반은 마련한 셈이다. 잘은 몰라도 2011년 예산도 만족할 만한 수준은 아니지만 다소 증액될 가능성이 높다.

그렇다면, 정부와 지자체의 매칭을 제외한 서울시 추가지원은 얼마나 확대될까? 서울시 2011년 장애인복지 예산(3,743억원) 중 기껏해야 연간 1,425명에 64시간 활동보조서비스를 지원하며 89억원만 배정한 것은, ‘생색내기’만을 고집하겠다는 의지의 표현인지, 아니면 늘 그랬던 것처럼 공급자 위주 장애인복지정책의 전형인 생활시설(739억원), 복지관(457억원), 주단기보호시설(121억원) 편성 등의 시설 유지 정책만을 견지하며 지역사회 참여 문턱에 바리케이드를 친 채 ‘장애인당사자의 목을 죌’ 것인지를 답해야 한다. 장애인당사자의 꿈은 여지없이 무너질 뿐이다. 난 여기에 한 표 던질란다.

활동보조서비스를 최초로 시행한 미국의 활동보조인서비스를 살펴보면, 법적근거가 재활법과 저소득층에 의한 의료보장 프로그램인 메디케이드에 근거하여 이루어지고 있다. 재활법의 경우, 제정시 자립생활과 장애인자립생활센터 및 해당 서비스에 대한 지원을 규정하고 있다. 따라서 미국은 재활법에 근거해 장애인자립생활과 장애인자립생활센터를 지원 할 수 있는 포괄적인 규정을 두고 각 주 별로 일정한 편차를 보이며 활동보조인서비스를 제공하고 있으며, 다른 한편으로는 메디케이드를 통해 가정 방문서비스를 제공하는 형태를 띄고 있다.

이런 미국의 예를 통해 한국에 맞는 활동보조 전달 체계를 다시 한 번 고민할 필요가 있기는 하다. 활동보조서비스는 특히 중증장애인의 보편적인 권리가 맞다. 따라서 전 장애유형을 포함시키되 장애유형에 따른 별도의 서비스 지원 방식을 고민할 필요가 있다. 또한 활동보조서비스의 대상은 보통 18세 이상의 성인으로 국한하지만 이는 절대적인 원칙이 될 수 없으며 필요한 사람 모두에게 필요한 만큼 제공될 수 있어야만 한다.

주지하다시피 조례 제정에서 필요한 부분은 ‘예산’과 ‘의지’의 문제다. 그러나 나는 이런 편협적이고도 정형화된 시각에 반대한다. 중앙정부든 지방정부든 단골 레퍼토리로 내놓는 ‘슈퍼 일성’이 있다. 바로 “예산이 없다”이다.

‘예산의 한계’라는 말을 다소 과격하게 또는 공무원스럽게 의역하면 “그거 하기 싫거든!”의 다른 표현이다. 그렇기 때문에 (장애인)복지는 예산의 문제가 아니라 ‘의지의 문제’라고 자주 지적되곤 한다. 하지만 이러한 ‘도덕적 촉발’이 얼마나 제도화에 기여할지는 알 수 없다. 나는 단언한다. (장애인)복지는 예산이나 의지의 문제가 아니라, 국가와 지방자치단체가 자국의 국민과 시민, 즉 세금을 내서 국가를 유지하는 데 기여하는 사람에게 당연히 제공해야만 하는 ‘의무 서비스’이다라는 것을. (장애인)복지의 새로운 프레임은 이렇게 조용히 천천히 그러나 혁신적으로 변화해야 한다.

요즘 모든 자치단체장뿐만 아니라 정치인까지 합세하여 이구동성으로 내놓는 단골 비전이 하나 있는데 바로 ‘복지’다. 무엇보다 그렇게 목 놓아 외쳐도 좀처럼 늘지 않던 수많은 지방자치단체의 장애인자립생활 정책입안과 예산 증액은 20여일 남짓 후인 2010년 세밑, 대한민국에서, 숱한 정치꾼들은 어떤 모습으로 우리 장애인당사자에게 다가올까?

내부로 시선을 옮겨 한 가지 짚고 넘어가야 할 점은 우후죽순 생겨나는 자립생활센터 문제다. 현재 우리나라에는 약 170여개의 자립생활센터가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요즘에도 한 달에 1~2개소 정도는 생겨나고 있어 정확한 추산이 어려울 지경이다. 센터의 양적증가는 장애인의 자립생활 운동이 확산되고 통일된 하나의 장애인 운동으로 자리 잡아가기 위해 바람직한 현상으로 볼 수도 있지만, 지나친 난립은 자립생활센터의 질적 하락이나 센터의 자정능력 부재(또는 도덕 불감 등), 역량 부족, 센터의 민주적 형태 운영 등의 문제점을 양산할 가능성이 상존하는 게 부인할 수 없는 현실이다.

원론적인 얘기이긴 하나 우리나라의 자립생활 운동은 서비스만이 아닌 권익옹호라는 권리의 측면이 강조되어야만 한다. 장애인자립생활지원 조례의 내용도 이러한 자립생활의 정신이 훼손되지 않는 건전한 방향으로 나아가길 기대한다.

두 달 전 쯤, 12살짜리 장애아들에게 기초생활보장 혜택(수급권자)이나 장애아동 부양 혜택이라도 받게 하기 위해 아버지가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는 소식을 접했다. 오죽하면 저랬을까 싶어 가슴 한 귀퉁이가 미어지게 아프다가도 아무리 그래도 아들을 위해 무슨 수를 써서라도 살아야지 싶어 괜한 분노가 치밀었다. 그렇다면, 정말 12살짜리 장애아들은 아버지의 소원대로 기초생활수급자가 될 수 있을까? 또 기초생활수급자가 된다고 해서 아버지가 살아있을 때보다 더 풍족한 삶을 누릴 수가 있을까?

어쩌면 이런 의문은 아무런 의미가 없는 공염불인지도 모른다. 그저 부끄러울 뿐이다. 나는, 부모가 죽어야만 국가의 복지시스템의 대상자가 될 수도 있는 이 황당한 장애인복지제도를 가진 대한민국의 일개 국민이지만, 그리고 장애계에서 장애인복지정책의 개선과 환경을 위해 일한다고 소박하게 자부하는 무명의 운동가이지만 도무지 쪽팔려서 견딜 수 없다.

이 부끄러움은 죽은 아비가 우리에게 던져준 날선 화두가 아닐까? 우선 우리부터라도 아비의 죽음을 요구하는 우리들의 이 빌어먹을 복지정책을 깨부수고, 뜯어고치기 위해 가슴 한복판에 깊게 심어놓고 다짐하고 또 그 아픔을 기억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