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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외부칼럼] 새해, 그리고 일각의 죽비소리
2010-02-02 14:33:00
관리자 조회수 24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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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해, 그리고 일각의 죽비소리

 

안진환(장애인사회연구소)

 

경인년 새해 벽두부터 온 나라가 날씨 때문에 아우성이다. 하루가 멀다 하고 퍼붓듯 쏟아지는 폭설에 곤혹을 치루더니 이제 연일 계속되는 동장군으로 또 호들갑이다. 자고 일어나면 올 겨울 가장 추운 날씨라는 일기예보도 이제는 무감각하게 받아들일 수 있을 정도로 추위에 익숙해졌음은 물론이다. 길가에 마치 두엄더미처럼 쌓여있는 더러운 눈더미를 포크레인과 트럭이 동원되어 치우는 생경한 모습도 어느 순간 마치 겨울철의 당연한 풍경처럼 자연스럽다.

이렇듯 우리는 첫경험의 놀람과 생경스러움도 똑같은 상황이 거듭되고, 고통이나 불편함을 지속적으로 경험하게 되면 마치 익숙한 상황으로 인식하고 체념해버리는 재주를 가진 듯하다. 이 고약한 재주는 어느 때에는 적응(適應)이라는 표현으로 미화되기도 하지만, 또 한편으로는 타성(惰性)에 젖었다는 말로 비판받기도 한다.

자, 지금 장애계는 2010년 요동치는 정치적 상황에 발목을 단단히 잡힌 채 부침을 거듭하고 있는 장애정책 상황에 적응하고 언제나처럼 타성이라는 고약한 버릇에 스스로를 내맡겨버릴 것인가, 아니면 다시 현실의 단단한 벽에 부딪혔던 옛 기억을 되살리며 다시 투쟁의 길, 그 풍찬노숙의 가시밭길로 나서야 하는가 하는 판단의 기로에 서 있다.

구랍 31일, 한나라당은 가차없이 서민복지 예산을 삭감한 채 날치기 통과시켰다. 거칠 것 없는 그들의 만행은 지난 7년 동안 장애대중의 피와 땀, 그리고 소망과 염원이 담긴 기초장애연금 예산을 절반으로 두 동강 내버렸다. 어디 그뿐인가. 중증 장애인 활동보조서비스 335억원과 시설퇴소장애인 자립정착금 5억원마저 모조리 삭감되었고, 여성장애인들의 출산지원을 위한 쥐꼬리만한 예산마저 송두리째 앗아가 버렸다. 이에 대해 장애인 국회의원들은 이구동성으로 ‘장애인을 우롱하는 처사’라며 개탄했다지만, 능력은 모자라나 우직함 하나로 주인을 섬긴 사람들은 아닌지, 의원직을 내던질 정도로 당사자성의 기개는 있는지 반성할 때이다. 지난 10일 원내복귀로 다소 스타일을 구기긴 했지만 미디어법 처리에 반발해 사퇴를 선언한 한 줌의 정의감 있는 의원들도 있던데.

도대체 이해할 수 없는 일은 국가권력의 시스템을 등에 업은 자들의 무도하기 짝이 없는 이른바 ‘약속깨기’이다. 장애연금은 장애계가 소득보장을 위한 절체절명의 과제로 인식하며 무려 7년에 걸쳐 꾸준히 요구해온 몸부림이었다. 아울러 장애연금정책이 우리나라의 현실적 상황에 맞는지 검토하고 연구해 그 합당한 방향과 조사결과를 줄기차게 건의하고 제안했다.

하늘도 감동했는지 ‘중증장애인 기초장애연금법안’이 마련되었고, 드디어 올해 시행을 앞두고 있다. 현행 장애수당에 고작 월 2만 1천원 인상된 이름뿐인 속칭 ‘껌 값 연금’이라는 장애계의 볼멘소리에 웬일인지 정부는 성실히 대화에 응하기까지 했다. 하지만 우리 장애계는 어리석게도 소위 ‘기획재정부안’이라 불리는 반토막 법안을 확인한 순간에서야 그들의 모든 호의적 반응들이 장애계의 반발을 무마시키려는 사기극임을 깨달았던 것이다.

그저, 고약하고 민망할 따름이다. 우리나라의 장애인복지예산 수준이 OECD국가 평균의 10분의1에 불과하다는 것쯤이야 이제는 장애대중들도 익히 알고 있는 사실이지만, 그 평균이하의 낮은 수준이 이처럼 정부의 저급한 사기극에 의해 유지되고 있다는 사실은 요즘에서야 뼈저리게 알게 되었다. 그래서 더욱 부끄럽고 한심스럽기만 하다. 저런 사람들이 모인 당을 지지하고, 그들을 국회의원으로, 또는 대통령으로 뽑아놓고 미래를 얘기하고 희망을 꿈꾸었던 몇 년 전의 우리를 기억하는 지금 이 순간 서슴없이 손가락을 자르고 자신의 얼굴에 침이라도 뱉어야만 하는 자학의 시간을 담담하게 인내해야 할지도 모른다.

혹자들은 말한다. 그나마 장애인연금법이라도 존치되고 시행되니 얼마나 다행인가?, 옛날에 비해 요즘 장애인들은 그럭저럭 잘 살고 있지 않은가? 착각하지 마라. 법의 존치와 시행으로 민주와 복지를 말한다면, 국가의 통치조직과 통치작용의 기본원리, 국가의 기본권을 보장하는 헌법이 시행되었던 1948년부터 우리나라는 민주국가였어야 했고, 장애인복지법이 시행되었던 1981년부터 우리나라는 장애인복지국가였어야 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어느 누구도 1990년대 이전의 대한민국을 민주국가라고 말하지 않으며, 1980년대를 복지국가의 시작으로 생각하지 않는다.

그 이유는 단순하고 명백하다. 법은, 존치와 시행보다 그 내용의 보편성과 법조문에 담긴 법철학적 정신을 이해하고 시행하는 권력자들의 마음가짐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그나마 장애인들이 예전의 무지와 견고하고 절대적인 사회적 차별에서 조금이나마 벗어날 수 있었던 것은, 현대국가로의 도약과 함께 사회 전반적으로 이뤄진 시스템의 발전, 선진 국가들과의 빈번한 정치·경제·사회적 시스템의 교류를 통한 국민들의 자각, 그 처연한 깨달음과 함께 봇물처럼 터져나온 민주주의운동과 장애인인권운동을 통한 지난한 노력 때문이다.

따지고 보면 상고출신 변호사가 대통령이 되고, 삽 한 자루로 가난한 고학생에서 대기업 CEO까지 출세한 사람도 대통령이 될 수 있었던 것도 모든 국민 누구나 대통령이 될 수 있다는 법조문(공무담임권)이 헌법에 새롭게 생겨서가 아니라 사회적 환경의 발전과 그에 따른 국민들의 인식의 변화 때문에 가능했던 것이다.

보수정권이자 웰빙정당인 한나라당에게 복지(福祉)는 정치인들의 고급한 정치행위를 위한 치장 외에는 아무것도 아니다. 국민의 삶의 질 향상과 사회안전망의 최후 보루인 사회복지정책 계획과 시행의 내용은 현실가능성도 없는 일회용짜리의 터무니없는 선거공약을 남발하며 온갖 공약책자의 페이지나 장식했다가 용도 폐기되는 운명을 반복한다. 장애인 표심을 자극하며 복지확대 기대감이라는 심리적 효과를 노리는 저급한 여의도발 정치상술일 뿐이다.

MB 또는 집권세력이 반서민, 반민생, 반복지 세력이라는 지탄을 받는 것은 지극히 당연하다. 한 국가의 복지정책 철학과 수준은 정책집행자들이 그 대상자들을 어떤 시각으로 이해하고 있는가와 직결된다. 만일 그들이 복지정책 대상자들을 한낱 저급한 동정으로, 정책의 효과를 자선이나 시혜로 인식한다면, 그 국가의 모든 국민들은 불행하다. 왜냐하면 그 나라 복지철학 수준 또한 OECD국가의 10분의1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복지란 모든 국민이 행복하게 살 최소한의 권리를 위해 국가가 마련해야만 하는 당연한 정책이지 국가가 베푸는 적선이나 동냥이 아니다.

이제 공은 다시 우리에게 되돌아왔다. 반으로 잘린 쓸모없는 공을 손에 쥔 장애계는 그 어느 때보다 치열한 도전에 직면해 있다. MB와 한나라당 집권기에는 장애인복지정책의 발전과 비전은커녕 기존의 정책을 유지하는 것조차 어렵다는 사실이 백일하에 드러났다.

하는 수 없는 노릇이다. 4대강의 언저리를 삽으로 모두 파 헤집고 강바닥을 파고 늘려 운하를 건설하든, 그 썩은 물 위에 관광용 잠수함을 띄우고 유람선을 띄우든, 부(富)가 흐르는 4대강에 로봇물고기를 상용화하든 그것은 현 정권을 선택했던 국민들이 그 물을 마시며 마땅히 책임질 일이다. 그리고 그 강바닥을 퍼낼 삽값과 평당 천만원이 넘는 아파트 융자금 예산을 복지예산에 넣고 복지예산이 전년도 대비 8.6%나 증가했다고 눙치고, 정작 장애인복지예산은 삭감해버리는 이 ‘추(醜)한 MB’를 지지했던 우리 중의 무수히 많은 우리는 혀를 깨무는 심정으로 반성해야만 할 것이다.

우리는 한나라당의 기만적인 정치행위를 목도하면서 정치인들이 어떻게 장애계의 염원과 꿈인 장애연금정책을 흐지부지 껍질만 남긴 채 허깨비 정책으로 바꿔치는지 똑똑히 지켜보았다. 그리고 슬퍼하고 분노했으며, 절망했다. 그리고 예전처럼 시간이 지나면 타성에 젖어 다시 현실에 적응하며 살아갈 것이다. 지금의 슬픔도 사라지고, 정치배들에게 향했던 분노도 금세 절망과 체념으로 가뭇없이 사그라질 것이다. 그리고 선거철이 되면 선거를 포기하거나, ‘구관이 명관’이라느니 ‘미워도 다시 한 번’을 외치며 다시 1번에 기표할지도 모른다.

이 슬픈 현실은 상상만 해봐도 모골이 송연하다.

480만 장애인, 우리의 힘은 정치행위를 통해서만이 현실화된다. 어쩌면 우리 장애계는 480만이란 이 거대한 숫자에 미혹되어 스스로를 대단한 정치적 선거파워집단으로 여겨왔을 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것은 현실적으로 따져보자면 명백한 착각이요 자가당착이다.

480만이란 숫자는 이리저리 찢기고 흩어져있고, 땅속에 묻혀있거나 강 속에 잠겨 있는 가상의 숫자에 불과한 것이다. 이를 눈치챈 정치권은 더 이상 이 480만이란 허울뿐인 숫자를 결코 두려워하지 않는다. 그러나 공교롭게도 이 신기루 같은 480만의 숫자를 권력화하기 위한 방법을 우리는 이미 학습했다. 뭉치면 된다. 너와 내가 뭉쳐 우리를 만들고, 뜻을 묶어 한 목소리를 내면 된다. 그럴 능력과 의지가 없다면 그저 현실에 적응하며 적선처럼 던져주는 한 끼의 일용할 양식에 만족하는 수밖에….

동해의 이름 없는 작은 백사장에서 바라본 새해의 첫 해는 붉었으나 차가운 빛으로 이글거렸다. 사위(四圍)의 어둠을 찢고 시나브로 떠오르던 그 서늘한 빛의 무리는 어느새 새해 소망을 기구(祈求)하는 사람들의 아우성으로 변해 온 세상을 뒤덮었다. 그 처연한 간구의 소리들이 우리 장애계의 타성을 꾸짖고 결코 녹록치 않을 현실을 일깨우는 일각(一覺)의 죽비소리였음을 새해 보름이 지난 지금에서야 깨닫고 소스라치게 놀란다.

아무려나 어쨌든 이 글은 새해의 희망을 얘기하는 첫 걸음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