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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이블뉴스 김경식 칼럼니스트】 엘리베이터가 없는 오래된 건물 앞에서 휠체어를 들어 올리는 사람들. 병원 대기실에서 반복되는 설명을 대신하는 보호자. 식당에서 “몇 분이세요?”라는 질문 뒤에 잠깐 흐르는 어색한 침묵. 장애인 당사자의 삶에서 가족은 종종 사랑 이전에 ‘함께 견뎌야 하는 현실’로 먼저 등장한다.
장애는 한 개인의 몸에 존재하지만, 사회는 그것을 가족 전체의 문제로 확장시킨다. 장애 당사자는 물론이고 부모, 배우자, 형제자매까지도 사회적 시선의 대상이 된다. 그래서 장애인 가족의 삶은 단순히 “정이 많은 가족 이야기”로 설명되지 않는다. 그 안에는 피로와 갈등, 미안함과 책임감, 그리고 쉽게 말할 수 없는 불편함이 함께 존재한다.
장애 당사자에게 가족은 가장 가까운 존재이면서도 동시에 가장 큰 미안함의 대상이 되기도 한다. 이동을 도와야 하고, 의사소통을 대신해야 하고, 일상을 조정해야 하는 순간들이 반복되기 때문이다. 특히 중증 장애인의 경우 가족은 단순한 동거인이 아니라 활동지원인, 운전기사, 보호자, 행정 담당자, 의료 동행자 역할까지 동시에 수행한다. 그 과정에서 가족 구성원들의 삶 역시 장애의 영향을 받는다.
형제자매는 어릴 때부터 “네가 이해해야지”라는 말을 듣고 자란다. 배우자는 돌봄과 생계를 동시에 책임져야 하는 상황에 놓인다. 부모는 노후를 걱정하기보다 자신이 세상을 떠난 뒤 남겨질 장애 자녀를 먼저 걱정한다. 장애인 가족의 삶은 이렇게 끊임없는 조정과 양보 속에서 흘러간다.
그러나 우리가 놓치지 말아야 할 것은, 이러한 고통의 상당 부분이 장애 자체 때문만은 아니라는 사실이다. 많은 경우 장애인 가족을 힘들게 만드는 것은 사회가 만들어 놓은 구조적 장벽이다.
경사로 하나 없는 건물, 접근할 수 없는 대중교통, 장애인을 고려하지 않은 키오스크와 정보 시스템, 부족한 활동지원 시간, 돌봄을 가족 책임으로 전가하는 복지 구조는 장애를 개인과 가족의 부담으로 만든다. 만약 사회가 처음부터 모두를 고려하는 방식으로 설계되었다면, 지금 가족이 감당하는 수많은 불편 중 상당수는 애초에 존재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장애인 가족의 어려움은 그래서 개인의 불행이나 특정 가족의 특별한 희생담이 아니라, 사회 구조의 문제이기도 하다. 장애인 당사자가 외출 한 번을 위해 가족의 도움을 반복적으로 요청해야 하는 현실, 가족이 병원과 복지기관 사이를 끊임없이 오가며 행정 절차를 감당해야 하는 현실은 결국 “함께 살아갈 준비가 부족한 사회”를 보여준다.
특히 한국 사회는 여전히 장애를 개인의 문제 혹은 가족 내부의 책임으로 바라보는 경향이 강하다. 그래서 장애인 가족의 헌신은 칭찬받지만, 정작 왜 그 헌신이 필수적일 수밖에 없는지에 대한 질문은 자주 생략된다. 그러나 진정으로 필요한 것은 가족의 무조건적인 희생을 미화하는 일이 아니라, 가족이 과도한 부담 없이도 함께 살아갈 수 있는 사회적 조건을 만드는 일이다.
그 과정에서 중요한 것은 ‘평등’의 의미를 다시 생각하는 일이다.
평등은 모두를 똑같이 대하는 것이 아니다. 서로 다른 조건과 특성을 가진 사람들이 함께 살아갈 수 있도록 사회가 필요한 조건을 보장하는 것이다. 휠체어 이용자를 위한 경사로는 특혜가 아니라 동등한 이동권의 보장이고, AAC 사용자에게 충분한 의사소통 시간을 제공하는 것은 배려가 아니라 인간다운 소통의 권리다. 활동지원 역시 누군가에게 주어지는 시혜가 아니라 지역사회 안에서 함께 살아가기 위한 사회적 기반이어야 한다.
장애인 가족은 바로 그 평등의 의미를 가장 현실적으로 보여주는 존재들이다.
가족은 누군가의 속도가 느리다고 해서 관계를 중단하지 않는다. 한 문장을 듣기 위해 더 긴 시간을 기다리고, 이동 하나를 위해 더 많은 준비를 한다. 비장애 중심 사회의 기준으로 보면 비효율적이고 불편한 일일 수 있다. 그러나 함께 살아간다는 것은 원래 누군가의 조건에 맞추어 서로 속도를 조정하는 과정에 가깝다.
어쩌면 장애인 가족이 매일 실천하는 삶은 경쟁과 효율 중심 사회가 잃어버린 공동체의 감각인지도 모른다. 빠른 사람만 기준이 되는 사회에서는 느린 사람은 뒤처진 존재로 취급된다. 하지만 인간의 삶은 누구나 어느 순간에는 돌봄이 필요하고, 기다림이 필요하며, 타인의 도움이 필요한 존재가 된다. 장애인 가족은 그 사실을 누구보다 먼저 경험하는 사람들이다.
물론 가족 안에도 갈등은 존재한다. 누군가는 지치고, 누군가는 억울함을 느끼고, 때로는 서로에게 상처를 주기도 한다. 장애인 당사자 역시 “나 때문에 가족이 힘들다”는 죄책감을 안고 살아가는 경우가 많다. 사회적 낙인과 편견은 그런 감정을 더욱 깊게 만든다. 사람들의 시선 앞에서 가족은 종종 설명해야 하는 존재가 되고, 장애인 당사자는 존재 자체를 미안해하게 된다.
그럼에도 가족은 다시 함께 살아간다. 왜일까. 가족이기 때문이다.
이 말은 단순한 감상적 표현이 아니다. 장애인 가족에게 가족은 서로의 불완전함을 견디는 관계라는 뜻에 가깝다. 누군가는 짜증을 내고, 누군가는 지치지만 다음 날 다시 병원에 함께 가고, 다시 식탁에 앉고, 다시 하루를 살아낸다. 장애인 가족의 사랑은 거창한 희생보다 반복되는 생활 속에서 드러난다.
어느 가족은 휠체어가 들어갈 수 있는 식당을 찾기 위해 한 시간을 더 이동한다. 어떤 부모는 AAC 기기를 사용하는 자녀의 한 문장을 기다리기 위해 긴 침묵을 견딘다. 어떤 배우자는 발음이 불분명한 말을 수십 년 동안 가장 정확하게 알아듣는 사람이 된다. 그것은 효율의 언어로는 설명되지 않는다. 하지만 인간다운 사회는 원래 효율만으로 유지되지 않는다.
장애 당사자에게 가족은 그래서 단순한 돌봄 제공자가 아니다. 사회가 끊임없이 “너는 불편한 존재”라고 말할 때, “그래도 우리는 함께 살아간다”고 말해주는 마지막 공동체에 가깝다.
그리고 그 공동체의 경험은 우리 사회에 중요한 질문을 던진다. 과연 우리는 서로의 차이를 감당하며 살아갈 준비가 되어 있는가. 누군가의 느린 속도를 기다릴 수 있는 사회인가. 장애를 가진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이 경쟁이 아니라 공존의 방식으로 살아갈 수 있는 구조를 만들고 있는가.
진정한 복지국가는 가족이 모든 것을 감당하도록 방치하는 사회가 아니다. 가족이 가족으로 남을 수 있도록 사회가 함께 책임지는 사회다. 충분한 활동지원과 접근 가능한 환경, 지역사회 돌봄과 차별 없는 제도는 결국 장애인만을 위한 정책이 아니다. 그것은 누구도 배제되지 않고 함께 살아가기 위한 사회의 최소한의 약속이다.
장애 당사자에게 가족의 의미는 완벽한 사랑이 아니다.
서로 불편하고, 때로는 지치고, 사회의 차가운 시선을 함께 견뎌야 하지만 그럼에도 쉽게 놓지 못하는 관계. 누군가의 속도를 기다려 주기 위해 자신의 삶의 속도를 조금 늦추는 관계. 그리고 세상이 “왜 그렇게까지 하느냐”고 물을 때, 특별한 이유 없이 “가족이니까”라고 답하게 되는 관계다.
어쩌면 평등하게 함께 살아간다는 것은, 바로 그런 관계들이 더 이상 희생만으로 유지되지 않아도 되는 사회를 만드는 일인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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