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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인공지능은 질문에 답하는 수준을 넘어, 사람을 대신해 웹사이트를 돌아다니고 상품을 고르고 결제 직전 단계까지 수행하는 단계로 진입했다.
오픈AI는 2025년 1월 ‘Operator’를 통해 양식 작성과 식료품 주문 같은 브라우저 작업 수행 기능을 공개했고, 같은 해 7월에는 ChatGPT agent가 자체 가상 컴퓨터로 웹을 탐색하며 “재료를 사고”, “일정을 잡고”, “실행까지 하는” 기능을 내놓았다. 비자와 마스터카드도 2025년부터 ‘agentic commerce’와 ‘Agent Pay’를 내세워 AI가 소비자를 대신해 검색·추천·결제까지 이어지는 상거래 구조를 공식화했고, 마스터카드는 2026년 3월 17일 한국에서 AI 에이전트가 실제 결제를 수행한 첫 사례를 발표했다. 이제 “행동형 AI를 통한 물품구매”는 더 이상 공상적 미래가 아니라 이미 시작된 현재다.
이 변화가 중증장애인에게 특히 중요한 이유는 분명하다. 행동형 AI는 단순히 “무엇이 좋다”를 추천하는 기술이 아니라, 사용자의 의도를 받아 검색하고 비교하고 선택하고 결제까지 이어지는 복수의 단계를 대행하는 기술이다.
다시 말해 구매 행위의 중심이 ‘세밀한 손동작과 반복 클릭’에서 ‘의사 표현과 목표 설정’으로 이동하는 것이다. 상지 기능의 제약이 크거나, 장시간 스마트폰 조작이 어렵거나, 긴 입력 과정 자체가 피로와 통증을 유발하는 중증장애인에게 이것은 단순한 편의가 아니다. 생필품, 식료품, 위생용품, 보조기기 소모품 같은 반복구매를 보다 적은 신체적 부담으로 처리할 수 있다는 점에서 일상의 구조 자체를 바꾸는 기술적 전환이 될 수 있다.
실제로 구매 과정은 장애인에게 가장 많은 마찰이 발생하는 디지털 구간 가운데 하나다.
W3C는 로그인·등록·구매에 쓰이는 폼을 별도의 접근성 과제로 다루고, 금융거래나 주문과 같이 되돌리기 어려운 행위에 대해서는 오류 예방 장치를 요구한다. 이 기준이 존재한다는 사실 자체가, 오늘날 온라인 구매가 얼마나 많은 입력·판단·확인 단계를 요구하는지 보여준다.
따라서 행동형 AI가 이 중간 단계를 줄여 준다면, 중증장애인의 소비는 더 이상 “도와달라고 부탁해야 하는 일”이 아니라 “스스로 지시하고 통제하는 일”이 될 수 있다. 자립의 핵심은 혼자서 모든 것을 하는 데 있지 않다. 자신의 의사가 거래의 출발점과 최종 결정권이 되는 데 있다.
더구나 한국 사회의 현실을 보아도 이런 보조는 절실하다. 과학기술정보통신부의 2024년 실태조사 결과에 따르면 취약계층의 디지털 정보화 수준은 평균 77.5%에 머물렀고, 장애인·고령자 등이 주로 이용하는 웹사이트의 접근성 수준은 66.7점으로 나타났다.
또 한국지능정보사회진흥원 자료를 바탕으로 한 2025년 보고서는 금융거래 서비스 이용률이 일반국민 73.0%, 고령층 61.0%, 장애인 66.8%라고 제시한다. 구매가 검색만으로 끝나지 않고 인증·결제·확인으로 이어진다는 점을 감안하면, 행동형 AI는 이 격차를 메우는 실질적 도구가 될 가능성이 있다. 접근성 격차가 남아 있는 사회에서, 행위 대행 능력을 가진 AI는 단순한 신기술이 아니라 생활 접근권의 보조 인프라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여기서 섣부른 낙관은 금물이다. 접근성 없는 환경 위에 얹힌 행동형 AI는 해방이 아니라 또 다른 우회 기술에 그칠 수 있다. W3C는 인증 과정에서 CAPTCHA나 인지적 기능시험이 대체수단 없이 사용되어서는 안 된다고 밝히고, 구매 폼은 짧고 단순하며 각 입력 요소가 분명히 식별되어야 한다고 강조한다.
이는 곧 현재의 많은 쇼핑·결제 환경이 여전히 장애인에게 불친화적일 수 있음을 뜻한다. 사이트 자체가 스크린리더와 맞지 않거나, 인증이 시각·기억·빠른 판단을 전제로 설계되어 있거나, 음성 인터페이스가 명료한 발화를 기본값으로 상정한다면, 행동형 AI는 일부 장애인에겐 도움을 주면서도 다른 중증장애인에게는 다시 배제를 확대할 수 있는 것이다. 기술이 ‘말만 하면 다 된다’고 홍보될수록, 실제로는 누가 말할 수 있고 누가 통제할 수 있는지 더 엄밀히 물어야 한다.
부정적 측면은 안전과 책임의 문제에서도 나타난다. 오픈AI는 ChatGPT agent 공개 당시, 웹에서 직접 행동하는 기능은 새로운 위험을 동반하며 악성 지시 주입(prompt injection), 실수, 민감정보 노출 가능성을 키운다고 설명했다. 그래서 실제 구매처럼 현실적 결과를 낳는 행동에는 사용자의 명시적 확인을 받도록 설계했다고 밝혔다. W3C 역시 금융·법률적 결과를 낳는 거래는 장애 사용자가 실수할 가능성을 고려해 검토·수정·취소 장치를 제공해야 한다고 본다.
중증장애인의 경우 이 위험은 더 구체적이다. 잘못된 상품 선택, 원치 않는 정기 결제, 주소 오류, 과잉 추천, 결제 정보 집중, 보호자·활동지원사·AI 사이의 책임 불분명 같은 문제가 생기면 피해는 단순한 불편이 아니라 생계와 돌봄의 혼란으로 이어질 수 있다. 따라서 행동형 AI의 핵심 쟁점은 “얼마나 똑똑한가”가 아니라 “얼마나 멈출 수 있고, 되돌릴 수 있으며, 사용자가 최종 통제권을 갖는가”에 있다.
행동형 AI를 통한 물품구매는 중증장애인의 일상에 분명한 긍정적 변화를 가져올 수 있다.
반복 입력과 미세조작의 부담을 줄이고, 타인 의존을 낮추며, 소비행위의 주체성을 회복시킬 수 있다. 그러나 그 전제는 단 하나다. 쇼핑몰, 결제 시스템, 본인확인 절차, 배송 추적 화면까지 전 과정이 처음부터 접근 가능하게 설계되어야 한다는 점이다.
접근성 없는 상거래에 AI만 덧칠하는 것은 혁신이 아니다. 그것은 결함 있는 구조를 더 화려하게 포장하는 일일 뿐이다. 이제 필요한 것은 “AI가 대신 사주는 시대”를 찬양하는 구호가 아니라, 중증장애인이 직접 지시하고, 직접 검토하고, 언제든 취소할 수 있는 구매권을 보장하는 제도와 설계 원칙이다. 행동형 AI의 미래는 기술의 속도가 아니라 접근성과 통제권의 깊이에서 판가름날 것이다.
출처 : 에이블뉴스(https://www.ablenews.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