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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슈와 칼럼 영상으로 장애인의 삶과 목소리 담았던 종필, 고마웠어요
2017-09-18 08:52:24
한국장애인단체총연합회 조회수 6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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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상으로 장애인의 삶과 목소리 담았던 종필, 고마웠어요
차별에 저항한 영상활동가, 故 박종필 감독 추모 영화제 17일까지 진행
박경석 노들야학 교장, "우리 목소리 잘 담아준 종필, 계속 기억할 것"
 
등록일 [ 2017년09월16일 12시35분 ]
 
 

차별에 저항한 영상활동가 故 박종필 감독 추모 영화제가 14일부터 17일까지 인디스페이스에서 진행되고 있다. 박 감독의 49재에 맞춰 진행되는 영화제 이튿날, 그의 주된 활동 무대였던 장애인 투쟁 현장을 담은 영화 '버스를 타자'가 상영되었다. 영화 상영 후에는 박경석 노들장애인야학 교장과 김덕진 천주교인권위원회 사무국장의 GV가 진행되었다.

 


 

김덕진(아래 김): 영화에서 지겹게 봤던 분을 이야기 손님으로 앞에 또 모셨습니다. 하하. 정말 오래된 영화죠. 제가 2002년에 처음 일을 시작했는데 그때 이 영화 보면서 장애인 투쟁을 공부했었던 기억이 납니다. 다시 보니 어떠세요.

 

박경석(아래 박): 이동권 투쟁은 2001년부터 2004년까지 계속됐고, 이 영상은 2001년부터 2002년까지의 투쟁을 담았습니다. 옛날 생각이 많이 나네요. 당시 종필이가 노들야학에 관한 이야기를 담은 '노들 바람'을 찍으려고 찾아 왔었어요. 그러다가 저희가 39일간 단식 투쟁을 했었는데, 그때 사람이 거의 죽게 되고 그러니까 종필이가 이 투쟁을 널리 알려야겠다고 생각해서 급하게 만들었어요. 그래서 그때 이 영화를 씨네큐브에서 처음 상영했네요. 이후로 이 영화를 정말 많이 봤는데, 영화관에서 보는 건 이번이 두 번째예요.

 

김: 급하게 만든 것 치고는 굉장히 잘 만들었네요. 다큐인에서 박 감독과 함께 일했던 송윤혁 감독 말로는, 홈리스 관련 작업을 할 때는 박 감독에게 연민과 슬픔이 있었는데 버스를 타자 찍으면서부터 분노의 시기로 접어들었다, 라고 말하더라고요.

 

박: 아무래도 홈리스 관련 작업은 투쟁이 있는 게 아니라 삶을 드러내는 거고, 저희는 맨날 경찰하고 싸우고, 부딪히고, 정부 누구 찾아가는데 맨날 답답한 소리나 하니까요. 저희는 싸우면서 욕도 하고 그러니까 속은 좀 풀리는데, 종필이는 가만히 찍어야 하니까 분노가 마음속에 쌓이기만 했겠다, 하는 생각이 들어요. 한 번은 같이 영상 찍던 후배 한 명이 저희 당하는 게 너무 열 받으니까 카메라 던지고 경찰이랑 막 싸웠어요. 그런데 나중에 종필한테 끌려가서 박살 났다고 하더라고요. ‘야, 네 맘은 알겠는데 다 그렇게 안 찍어버리면 어떡하냐’라고요. 박종필이 다큐 작업하는 스타일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기억이에요.

 

김: 기록자로서 현장에 있으면서 친구들이 끌려가는데도 묵묵히 찍어야 한다는 의무감과 같이 싸우고 싶은 마음이…. 그래도 이렇게 기록되어 남겨지니까, 저도 만약 이 영화를 보지 않았더라면 장애인들이 왜 그렇게 버스 타겠다고 목숨 걸고 싸우는지 선뜻 이해되지 않았을 것 같아요. 하지만 이동권 투쟁, 아직도 계속되고 있죠?

 

: 네. ‘버스를 타자’에 나온 저상버스 도입과 지하철 승강기 투쟁이 그래도 나름 예산과 계획을 확보하고 난 후에도 투쟁은 계속됐어요. 기차에 휠체어석 확보하는 거, 그거 되고 나서는 또 지금 고속버스 휠체어 이용 장애인도 탈 수 있게 만들라고 투쟁하고 있고요.

 

: 기차 투쟁할 때 저도 기억나요. 그때 역장인가 철도청 사람인가가 나와서 ‘장애인들이 기차를 많이 안 탄다’라고 했잖아요. 그랬더니 누가 ‘나와봤자 못 타니까 안 타는 거다. 일단 만들어 봐라. 만든 만큼 다 탈 테니’라고 이야기했어요. 고속버스 투쟁도 비슷하죠? 일단 만들어 봐라.

 

: 네. 근데 계속 고속버스 사업자 이야기를 하는 거예요. 고속버스는 시내버스나 기차와 달리 전부 개인사업자니까. 사업자들은 휠체어석 하나 만들려면 일반 좌석 4개를 없애야 한다, 여기서 발생하는 손해 감당 못 한다. 그럼 국가가 이걸 보전하면 쉽게 해결되는데, 국가는 개조비용은 줄 수 있지만, 운영비용은 못 준다, 이거예요.

 

: 요즘 보니까 프리미엄 고속버스도 나오고 했던데. 그런 거 보면, 비싸도 만들 수 있을 것 같긴 한데 말이죠.

 

: 저상버스도 못 만든다고, 불가능하다고 했는데 다 됐잖아요. 정말 ‘불가능’한 게 아니라 결국 다 돈 문제죠. 국토부에서 몇 년째 시범사업 예산 16억을 책정하는데, 기획재정부에서 늘 깎여요. 기재부가 안 된다고 하니까 국회도 안 된다고 하고. 다 짜고 치는 고스톱이에요.

 

이 짜고 치는 고스톱판에 끼어들어서 뭔가 해야 할 텐데, 그렇죠?

 

: 그래서 이번 추석 연휴 때 11박 12일로 강남고속버스터미널에서 농성하려고요.

 

: 어휴, 고향 가는 사람들이 굉장히 싫어하겠어요. 지금 강서구 특수학교 설립 둘러싼 갈등도 그렇고, 아직도 사회에서는 ‘옛날보다 장애인 복지 굉장히 좋아지고 해줄 만큼 해줬는데 또 떼쓴다’는 인식이 남아있는 것 같아요. 이런 걸 어떻게 돌파해야 할까요?

 

: 그게 저희 안의 고민거리예요. 사회의 공감을 얻는 것이 중요하긴 한데, 그 방식은 어떠해야 할까. 사실 어디 시설에서 맞아 죽었다, 부모들이 무릎 꿇었다, 이런 자극적인 사건이 있으면 달려들어서 말초적으로 전달하는 게 주류 언론의 경향이거든요. 이런 상황에서 국가나 정치인들은 맨날 국민의 인식과 공감을 먼저 얻어야 한다고 하니까, 저는 태평양에 돌멩이 던지는 느낌인 거예요. 아, 차라리 욕을 먹는 게 짓밟히는 게 더 관심받고 공감을 얻는 거라고 생각해서 투쟁의 방식을 지속하는 거예요. 무관심이 제일 무기력해요.

 

: 법 만드는 사람들 늘 여론 이야기하잖아요. 그런데 ‘옳은 일’ 할 때는 여론 신경 쓰지 않고 가치의 방향대로 하는 게 그들의 일 아닌가요? 예를 들어 한반도 정세가 불안하니까 ‘북한에 먼저 쳐들어가서 전쟁하자’는 여론이 설령 70%가 넘게 나온다고 하면, 여론이 높으니까 하는 게 옳은 건가. 아니잖아요. 장애인, 노동자 등의 투쟁이 결과적으로 사회에 고루 이익을 끼치는 일인데, 이걸 ‘사회적 공감대가 부족하다’는 이유로 가로막는 게 참 답답합니다.

 

: 그래서 종필의 카메라가 참 소중했어요. 우리의 싸움을 잘 담아서 사람들에게 알리고, 정치인이, 국가가 나서지 않는 사회적 공감과 인식 형성을 만드는 데 큰 역할을 했으니까요.

 

GV도중 답변을 생각하고 있는 박경석 교장
 

: 그러고 보면 박 감독 영화 중 홈리스나 세월호 관련 다큐 빼고는 모든 다큐가 다 박경석이 주인공인 거 같아요. 박 감독이 돌아가시기 전에 교장 선생님 다큐 못 찍어서 아쉬워했다는데 그럴 필요가 있나? 이미 엄청 찍어놨는데? (일동 웃음)

 

: 하하. 종필이가 장애 운동을 쭉 정리하는 작업을 하고 싶어했어요. 그런데 어느 날 ‘어? 특별히 할 게 없네. 형 찍은 거 편집만 하면 장애 운동의 역사 기록을 남길 수 있겠는데’ 하더라고요. 그런데 그 작업을 못 마치고 떠나갔네요.

 

: 후배 감독님들이 장애 운동을 계속 기록하고 담으면 좋을 것 같아요.

 

: 네. 종필처럼, 그냥 일시적으로 기자회견이나 집회 찍고 가는 정도로는 제대로 된 기록을 담을 수 없다고 생각해요. 투쟁과 또 거기에 참여하는 사람들의 삶의 궤적을 따라가며 담는 활동이 꼭 필요해요. 그런 영상 활동가들이 많아졌으면 좋겠습니다.

 

: 세련된 편집, 좋은 화면 없어도 충분히 감동과 공감을 느낄 수 있는 이런 소중한 기록들이 지속적으로 만들어질 수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박 감독의 ‘후배’들이 많이 많이 생겨나면 좋겠네요.

 

관객 1: 박종필 감독님에 관해 생각나는 에피소드가 있으시면 말씀해 주세요.

 

: ‘버스를 타자’에 나온 투쟁 할 때, 제가 벌금 500만 원, 최옥란 열사가 300만 원 받았었어요. 저는 돈이 없으니 노역 살겠다고 구치소 들어갔는데, 저는 장애인이라고 노역을 하루 3만 원 쳐주더라고요. 꽤 오래 살아야겠다 싶어서 깜깜했는데, 그때 누가 벌금을 내줘서 한 3일 후엔가 나왔어요. 그랬더니 종필이 자식이 글쎄, ‘형, 왜 이렇게 일찍 나왔어!’ 하는 거예요. ‘버스를 타자’ 영상을 제가 투쟁하다가 구치소에서 몇 달 살다 나오는 거로 마무리하려 했는데 너무 빨리 나오니까 제 딴에는 ‘그림’이 안 나온다 이거죠. 아, 야속했어요(일동 웃음).

 

관객 2: 장애 운동에서 유난히 많은 사람이 빨리 떠나는 것 같아요. 특히 박 감독님과는 각별하셨기에 많이 힘들어하셨다고 들었는데, 지금은 어떠신가요.

 

: 간암 말기라는 말을 듣고, 제가 알기로는 그러면 얼마 못 사니까. 사람들 많이 만나고 인사 제대로 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많았어요. 그런데 종필이가 싫어했죠. 형, 절대 알리지 마, 하고 신신당부를 하더라고요. 그때 제가 ‘사고’를 쳐서라도, 우겨서라도 작별할 수 있는 시간을 만들걸. 그러지 못한 게 무척 후회돼요. 그런데 당시에는 저도 종필이의 죽음이 임박했다는 소식을 알리면 진짜 죽을 것 같았어요. 머리로는 이미 알고 있었는데도.

 

: 우리가 박 감독이랑 제대로 작별을 못 해서 이렇게 영화제도 하면서 질척거리나 봐요(일동 웃음).

 

: 앞으로도 종필 기억하는 영화제 매년 했으면 좋겠어요.

 

박경석 교장은 “종필이에게 노래를 불러주고 싶어서 준비해왔다”며 마이크를 고쳐 들었다. “종필이가 생전에 탈시설에 관한 작품을 만들고 싶어했다”라며 그는 자신이 직접 개사한 노래를 불렀다. 노래 중간, 박 교장은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종필이가 우리가 함께했던 시간과 카메라는 우리의 삶을 기록하고 장애인의 목소리를 담았습니다. 종필이한테 줄 수 있는 게 우리는 별로 없어요. 고생도 많이 시켰고. 함께했던 세월 헛되지 않게 하는 것이 제가 종필한테 줄 수 있는 일인 것 같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