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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외부칼럼]장애인 당사자주의의 비판적 이해를 위하여
2012-07-16 16:5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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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보평론』 2012년 여름호

                                 장애인 당사자주의의 비판적 이해를 위하여
                                                                                             김도현|계간『함께웃는날』 편집장

1. 논의를 시작하며


한국사회의 장애인운동 내에서 언제부터인가 당사자주의는 뜨거운 감자였고 지속적인 논쟁의 대상이 되어왔다. 글자 그대로의 당사자주의(當事者主義)―독일어로는 Parteienprinzip, 영어권에서는 adversary system이라고 표기되는―란 원래 법률 용어로써, 소송의 주도권을 법원이 갖는 직권주의(職權主義)와 달리 소송의 주도권을 당사자가 갖고 원고와 피고가 서로 대립하여 공격․방어를 행하는 소송 형식을 일컫는 말이다. 이에 비추어본다면, 정치적인 의미에서의 당사자주의란 이해관계의 당사자가 누군가(전문가)의 대리를 거치지 않고 직접 자신의 의견을 표현하며 스스로의 권익을 지켜내는 것이라고 해석할 수 있다.
같은 한자문화권 내에서 장애인운동이 일찍부터 발전했던 일본에서는 이러한 당사자주의라는 용어가 사용되어 왔지만, 사실 서구의 장애인운동이나 장애학 내에서 당사자주의에 정확히 대응하는 개념어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나 미국의 자립생활운동가인 제임스 찰턴James I. Charlton의 저서 James I. Charlton, Nothing About Us Without Us: Disability Oppression and Empowerment, Berleley: University of California Press, 1998[제임스 찰턴, 『우리 없이 우리에 대한 것은 없다』, 전지혜 옮김, 울력, 2009].
 제목이기도 한 ‘Nothing about Us without Us(우리를 제외하고는 우리에 관해 어떤 것도 하지 말라)’라는 슬로건에 당사자주의와 유사한 함의가 표현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그리고 역시 정확히 일치하지는 않지만, 당사자주의는 자기대표권(right to self-representation)의 한국적 표현, 또는 자기결정권(right to self-determination)의 확장된 적용이라고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아래에서는 한국 장애인운동 내에서 이러한 당사자주의를 하나의 운동 이념으로서 주창하고 있는 한국DPI가 당사주의를 어떻게 설명하고 있는지를 살펴본 후, 영국의 장애학계와 일본의 장애인운동 내에서 제기되었던 당사자주의 관련 논쟁 및 비판을 검토하고, 당사자주의가 기반하고 있는 ‘정체성의 정치(politics of identity)'가 지닌 한계점을 ‘횡단의 정치(transversal politics)'와의 대비 속에서 고찰할 것이다. 그리고 자기대표권에 대한 다른 표현으로서의 당사자주의란 모든 대중운동에 있어 그 출발점에 놓여있는 기본적 원리들 중 하나이지만, 운동이 나아가고자 하는 (혹은 나아가야 할) 방향을 드러내주는 이념이 될 수는 없음을,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하나의 운동 이념으로서 전면에 내세우는 것은 특정 집단의 이익에만 근거한 운동, 그리고 체제에 포섭된 운동 세력의 이념 부재를 드러내는 것일 뿐임을 지적할 것이다.

 

2. 당사자주의에 대한 그 주창자들의 기본적 설명


국제적으로 장애인 당사자주의의 등장은 국제장애인연맹(Disabled Peoples' International, DPI)의 출범과 깊은 연관성을 지니고 있다. 1980년 캐나다 위니펙에서 열린 국제재활협회(Rehabilitation International, RI) 세계 대회에 참석했던 세계 각국의 장애인들은 의도적으로 이사회의 과반 이상을 장애인 대표에게 할당할 것을 요구하였다. 그러나 의료․재활 전문가들의 국제 조직인 RI는 당연히 이를 거부하였고, 이를 계기로 DPI의 창설을 발의하게 된다. 이후 DPI는 1981년 싱가포르에서 제1회 세계대회를 열고 정식으로 출범했다. 즉, 당사자주의는 앞서 언급되었듯이 장애인의 문제는 장애인 스스로 대변해야 한다는 자기대표권의 원칙에 대한 다른 표현이라고 이해할 수 있다. 한국에서 자립생활운동(Independent Living Movement, ILM)이 본격화되기 이전부터 당사자주의의 기치를 걸고 활동해왔던 단체 역시, DPI의 한국지부 성격으로 1986년에 결성된 한국DPI이다.
한국에서 당사자주의 논쟁은 기본적으로 제도권 내 사단법인 단체들의 연합체인 한국장애인단체총연맹(약칭 한국장총)과 한국장애인단체총연합회(약칭 장총련)를 중심으로 진행되어 왔다. 한국DPI, 한국지체장애인협회(약칭 지장협), 한국자립생활센터총연합회(약칭 한자연), 한국장애인인권포럼 등이 중심이 된 장총련은 한국장애인재활협회와 장애우권익문제연구소 등이 참여하고 있는 한국장총을 장애인의 단체(organization of the disabled)가 아닌 장애인을 ‘위한’ 단체(organization for the disabled)라며 장애인계의 대표성을 자임했고, 한국장총은 장총련이 이권 다툼을 중심으로 한 이익단체에 머물고 있다며 비판했다. 그러나 장총련의 회원단체였던 한국시각장애인연합회(약칭 한시련)가 한국장총에 가입하면서, 소위 말하는 지․농․맹 3개 ‘당사자’ 단체 중 농과 맹을 대표하는 조직이 한국장총에 포진하게 되자 이러한 논쟁의 구도는 다소 흐려지게 된다. 그러다 2001년부터 이동권 투쟁을 시작으로 성장한 현장 대중투쟁 중심의 진보적 장애인운동 세력이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약칭 전장연)로 집결하면서, 당사자주의 논쟁이 새롭게 부활하는 양상을 띠게 된다. 즉, 당사자주의를 전면에 내세우는 한국DPI와 한국DPI 세력이 주도하는 한자연은 전장연을 비장애인 운동권 세력에 의해 휘둘리고 있는 조직이라고 비판하고, 한자연의 상임대표였던 고관철 씨는 2007년에 조직의 활동목표를 밝히며 회원단체에게 배포한 글에서 다음과 같이 주장하고 있다.
“운동에 있어 장애인이나 비장애인이나 차별해서는 안 된다는 논리로 비장애인 운동권들이 장애인들을 파고들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간의 우리나라의 민주주의 운동에 있어서 학생운동은 학생이 주인이었으며, 노동운동은 노동자가, 농민운동은 농민이 여성운동은 여성이, 시민운동은 시민이 하였습니다. 그래서 각자가 자기 운동이 주체가 되었을 때, 이 사회에서 서로 평등해질 수 있는 것입니다. 더 이상 비장애인운동권이나 정당의 이념에 장애인들이 제물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장애인 스스로 주체적 이념, 즉 당사자주의에 의한 주도적 역할을 하면서 비장애인들과 정당을 포함한 시민사회단체들이 지원자로서의 역할을 할 때, 우리의 주체적 운동에서 그들을 이용할 수 있을 때에, 비로소 진보적장애인운동으로 올바르게 가는 것입니다. 따라서 계급운동이나 정당주도의 정치운동으로 오염된 장애인 운동을 거부하고 우리의 자주적이고 주체적인 당사자주의에 기반한 자립생활운동을 해 나가야 할 것입니다.”(고관철,  「2007년 한자연의 방향과 과제」中, 강조는 인용자)
 전장연은 보수화된 장애인 단체들이 장애인계의 대표성을 인정받아 정책 결정 파트너가 되고 예산 지원을 선점하는 데 있어 생물학적 당사자주의를 방패막이로 삼고 있을 뿐이라고 비판하는 양상을 띠게 되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한국DPI 자신은 이러한 장애인 당사자주의를 어떻게 규정하며 설명하고 있을까? 가장 흔하게 인용되는 장애인 당사자주의의 정의는 “장애인의 정치적 연대를 통해 장애인을 억압하는 사회 환경과 서비스 공급체계의 불평등한 권력관계를 비판․견제함으로써 장애인의 권한과 선택 및 평가가 중시되는 장애인복지를 추구하며 그 결과 장애인의 권리, 통합과 독립, 그리고 자조와 자기결정을 달성하려는 장애인 당사자 주도의 발전된 권리운동”이라는 것이다. 이익섭, 「장애인 당사자주의와 장애인 인권운동: 그 배경과 철학」, 『제4기 장애인청년학교 자료집』, 서울DPI, 2004. p. 12.
 그리고 한국DPI의 김대성 사무총장은 「장애인 당사자주의 운동의 참여와 연대정신」이라는 글에서 당사자주의가 장애인운동의 이념임을 명확히 한 뒤, “당사자와 당사자주의는 다르다. 당사자라고 해서 당사자주의를 지향한다고 볼 수는 없다. 또한 당사자 단체라 해서 당사자주의를 지향한다고 볼 수 없다”고 쓰고 있다. 장애인 당사자 중에서 당사자란 이유만으로 정치권이나 정책결정 과정에 편입되어 당사자에 반하는 내용을 만들고 당사자 참여를 배제시키는 사람도 있고, 당사자 단체지만 장애인의 자기결정권과 참여가 무시되는 단체도 있다는 것이다. 더불어 다양한 형태의 유사(類似) 당사자주의를 비판하면서, 그러한 유사 당사자주의로 “합리적 이유와 절차적 동의 없이, 혹은 상황적 맥락과 우선순위를 모두 무시하고 ‘장애’만을 이유로 하는 앙상한 논리를 내세우는” 장애의 무기화․상표화와 “장애인 내에서도 소외되거나 약자가 되는 장애 유형을 만들어 내는” 편향된 당사자주의 등을 들고 있다. 김대성, 「장애인 당사자주의 운동의 참여와 연대정신」, 『진보평론』 18호, 현장에서 미래를, 2003년 겨울, pp. 181~186.

다른 한편, 대구DPI와 한국DPI에서 오랫동안 정책 담당자로 일해 왔던 한국장애인인권포럼 장애인정책모니터링센터 윤삼호 소장은 장애인운동을 ‘비장애인 세계와의 관계’ 속에서 ①비장애인 세계에 포섭된 장애인운동 ②비장애인 세계와 연대를 중시하는 장애인운동 ③비장애인 세계와 긴장을 중시하는 장애인운동으로 분류한다. 그리고 첫 번째 ‘비장애인 세계에 포섭된 세력’으로 다소간 의외일 수도 있지만 지장협, 한시련, 한국농아인협회(약칭 한농협)과 같은 유형별 장애인 단체를 꼽는다. 그리고 이들 단체들이 중앙 혹은 지방 정부로부터 각종 보조금과 지원금 명목으로 재정을 지원 받는 대신 정부에 온건한 태도를 취하고 장애인의 권리를 위한 투쟁에 함께 하지 않으며 또한 ‘장애인=당사자’라는 지극히 단순한 사고에 매몰되어 있기에, 장애인 당사자주의를 외치고는 있지만 그 속에 장애인은 있을지언정 당사자주의는 없다고, 즉 사이비 당사자주의라고 비판한다. 두 번째 ‘비장애인 세계와 연대를 중시하는 세력’으로는 (장애우권익문제연구소를 비롯해) 전장연을 꼽는데, 전장연은 민중주의를 강조하면서 장애인운동의 논리를 기존의 좌파적 논리에 기계적으로 끼워 맞춘다고 비판한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비장애인 세계와 긴장을 중시하는 세력’으로 한국DPI를 꼽으면서 진정한 당사자주의를 담지하고 있는 조직으로 평가하고 있다. 윤삼호, 「장애와 정치」, 『2005년 장애아카데미 자료집』, 대구DPI, 2005, pp. 72~76.

이처럼 당사자주의의 주창자라고 할 수 있는 한국DPI는 당사자와 당사자주의가 다르고, ‘장애인=당사자’라는 등식은 성립하지 않는다고 규정함으로써, 생물학적 당사자주의나 사이비 당사자주의와 선을 긋는다. 그러나 여기서의 문제는 당사자주의를 내세우는 조직 중 어떤 세력이 진정한 당사자주의이며 어떤 세력이 사이비 당사자주의인가에 대한 판단 기준은 지극히 주관적일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윤삼호 소장은 지장협, 한시련, 한농협을 사이비 당사자주의라고 비판했지만, 최근의 글에서 당사자주의를 내걸고 활동하는 단체에 (한시련과 한농협은 제외하고) 지장협을 별다른 비판 없이 포함시키고 있는 데, 윤삼호, 「한국 장애운동의 어제와 오늘: 장애-민중주의와 장애-당사자주의를 중심으로」, 『진보평론』51호, 2012년 봄, p. 298.
 이는 앞서 기술된 것처럼 지장협이 한국DPI와 함께 장총련을 구성하고 있다는 것 이외에는 별다른 근거가 존재하지 않는다. 또한 한국DPI와 한자연은 그들이 사이비 당사자주의라고 비판하는 세력과 근본적으로 얼마나 다른가 하는 것 역시 논란이 될 수밖에 없다. 이명박 정부 출범 이후 장총련 내에서 헤게모니를 확대하며 정부로부터 많은 지원을 받고 정부에 온건한 태도를 취하는 단체가 한국DPI이고, 2007년에 활동보조서비스가 처음 실시될 때 서비스 제공 대상에서 지적장애인 및 자폐성장애인을 배제하려는 정부의 입장에 동조하며 ‘편향된 당사자주의’를 드러낸 것이 바로 한자연이었기 때문이다. 이에 대해서는 김도현, 「자기결정권은 전제가 아니라 목표다: 활동보조인서비스(PAS)의 대상과 자립생활(운동)의 주체 논쟁에 부쳐①」, 『에이블뉴스』 2006-07-26 입력기사(http://www.ablenews.co.kr/News/NewsContent.aspx?CategoryCode=0009&NewsCode=10674) 및 「보편적인 권리의 쟁취에 힘을 모으자: 활동보조인서비스(PAS)의 대상과 자립생활(운동)의 주체 논쟁에 부쳐②」, 『에이블뉴스』2006-08-02 입력기사(http://www.ablenews.co.kr/News/NewsContent.aspx?CategoryCode=0009&NewsCode=10751)를 참조하라.

 


3. 영국 장애학 내에서의 당사자주의 논쟁


영국에서 발간되는 국제적 장애학 저널인 『장애와 사회(Disability & Society)』에서는 1997년에 당사자주의 논쟁이라고 부를 수 있을 만한 지상 논쟁이 일련의 기고문을 통해 이루어지게 된다. 이 논쟁은 비장애인인 드레이크(Robert F. Drake)가 「나는 여기서 무엇을 하고 있는가? ‘비장애’인과 장애운동」라는 짧은 에세이를 기고하면서 시작되었다. 그의 글은 기본적으로 장애학과 장애인운동 내에서 장애인의 중심성을 강하게 견지하면서, 연대자내지 조력자로서 비장애인의 역할은 무엇이 될 수 있는가라는 고민을 담고 있는데, 그 주요 내용을 요약해 보면 다음과 같다. Robert F. Drake, “What Am I Doing Here? ‘Non-disabled’ people and the Disability Movement”, Disability & Society 12 (4), 1997. pp. 643~645.

드레이크는 우리사회 전반이, 그리고 특히 전통적인 자선단체들이 실질적으로는 장애인들을 무력화시키고 그들의 목소리를 강탈하고 있다고 분석하면서, 의료적 장애모델이 아닌 사회적 장애모델에 동의하는 비장애인이라면 당연히 장애인운동의 발전을 위해 기여를 하고자 원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그러한 비장애인들이 반드시 유의해야 할 지점이 있는 데, ①비장애인이 장애인을 대신하여 발언하는 것은 부적절하며(예를 들어, ‘비장애’인이 반차별 입법을 위한 로비에 장애인과 함께 결합하는 것은 받아들일 수 있는 반면, 그들만이 장애인을 위해 로비를 하는 것은 받아들이기 어렵다) ②비장애인은 운동 내에서 어떠한 권력적 지위도 추구하지 말아야 하고 ③비장애인이 직접적으로 장애인을 다루는 연구를 수행하는 것도 역시 적절하지 않을 것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장애인운동에 대한 비장애인 및 비장애인 조직의 정당한 역할은 ①사회와 사회의 정책 및 관행들이 장애를 만들어내는(disabling) 양상을 연구와 조사를 통해 드러내는 활동 ②장애인 당사자 단체들에게 자원을 제공하는 것 ③장애인 당사자 단체들로부터의 특정한 요청들(정보나 다른 형태의 도움들)에 응답하는 것이라고 제시한다.
드레이크가 이와 같은 주장을 하는 이유는 장애인운동도 하나의 활동이라고 했을 때, 다양한 활동 영역에서 장애인에게 가해지는 사회적 불리함이 장애인운동 내에서도 존재할 수 있기에, 비장애인들이 이에 대해서 민감하게 고민하며 자신의 역할을 설정해야만 한다고 인식하기 때문이다. 그의 이와 같은 인식은 장애인과 비장애인의 “실제적이고 완전하며 지속가능한 친선관계(rapprochement)는 사회와 정치와 경제에서의 충분한 변화가 이루어져서, 장애인들이 완전한 시민권을 누리고 그들의 문화와 정체성이 인정되고 존중받을 때에만 가능할 수 있을 것”이라는 결론 부분에서도 잘 드러나고 있다.
그런데 이처럼 장애인의 당사자성 내지는 중심성을 강하게 인정하는 듯 보이는 드레이크의 글에 대해 장애인인 브랜필드(Fran Branfield)는 「당신은 여기서 무엇을 하고 있는가? ‘비장애’인과 장애운동: 로버트 드레이크에 대한 응답」이라는 기고문을 통해 강한 반론과 비판을 제기한다. Fran Branfield, “What Are You Doing Here? 'Non-disabled' people and the disability movement: a response to Robert F. Drake”, Disability & Society 13 (1), 1998. pp. 143~144.
 브랜필드는 비장애인과 장애인운동 간의 관계는 비록 불가능하지는 않겠지만 매우 곤란한 것이며, 따라서 비장애인은 장애인운동에서 일정 정도 배제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가 이렇게 주장하는 이유는 장애인과 비장애인은 근본적으로 다른 ‘위치(position)’에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즉, “‘비장애’인이 아무리 ‘신실하고’, ‘동조적이고’ 그 밖에 어떠한 긍정적 태도를 지닌다 할지라도 항상 ‘비장애인’의 위치에서 그러한 것”이며, “‘비장애’인, 그들의 가치, 그들의 문화는 장애인의 예속을 분석하기 위한 대상들이고… ‘비장애’인은 우리가 있는 곳에 있지 않으며, 결코 그렇게 될 수 없다.” 또한 “그들[비장애인들]의 경험, 그들의 역사, 그들의 문화는 곧 장애인 억압의 일부”라는 것이다. 더불어 브랜필드는 비장애인은 운동 내에서 어떠한 권력적 지위도 추구하지 말아야 한다는 드레이크의 발언 역시 공격의 지점에 대한 스스로의 변명일 뿐이라고 일축하며, 장애인이 장애인의 해방에 대한 창도자이자 설계자가 되어야 한다고 결론짓는다.
이에 대해 더킷(Paul S. Duckett)은 「당신은 여기서 무엇을 하고 있는가? ‘비장애’인과 장애운동: 프랜 브랜필드에 대한 응답」이라는 글에서 브랜필드의 주장에 대한 강한 우려를 표시한다. 더킷의 주장은 다음과 같이 요약할 수 있다. Paul S. Duckett, “What Are You Doing Here? 'Non-disabled' people and the disability movement : a response to Fran Branfield”, Disability & Society 13 (4), 1998. pp. 625~628.

①브랜필드의 글은 비장애인으로부터 장애인을 분리하는 이분법적인 설정에 토대하고 있다.
②비장애인을 억압자, 장애인을 피억압자라고 지칭하는 방식은 장애의 문제를 생리적인 차원으로 치환해 버릴 수도 있다.
③억압은 단순하게 이분화 할 수 없으며, 장애인 역시 장애인의 억압자가 될 수 있다.
④소수자 해방은 사회 전반적인 변화를 통해 가능하며, 장애인과 비장애인 간의 연대와 지지를 필요로 한다.
그리고 더킷은 의도적으로 자신이 장애인인지 비장애인지를 밝히지 않겠다고 하면서, 자신의 장애 여부가 기고된 글을 독해하고 그 올바름을 판단하는 데 차이를 발생시키는지를 묻는다. 다시 말해서, 장애인이면 당사자의 주장이니까 옳은 것이고, 비장애인이면 당사자가 아니니까 틀린 것이냐는 것이다. 이에 대해 그렇다고 얘기할 수 없다면, 장애인만이 장애운동과 관련된 이슈에 대해 목소리를 내야하고, 장애학에 능동적으로 참여해야 한다는 주장은 흔들리는 것이 아니냐고 반문한다. 즉, 생물학적으로 장애인인지 아닌지가 장애와 관련된 어떤 주장 및 실천의 정당성을 담보해주는 근거가 될 수는 없다는 것이다.

 

4. 일본에서 제기되었던 당사자주의 비판


일본의 저명한 월간지 『현대사상(現代思想)』은 1998년 2월호의 특집으로 ‘신체장해자’를 다룬바 있다. 일본에서 장애인을 지칭하는 용어로 장해자(障害者)가 쓰인다.
 이 특집의 일부로 기고된 「당사자환상론: 혹은 마이너리티 운동에 있어서 공동환상의 논리」라는 글에서 토요타 마사히로(豊田正弘)는 당사자주의를 신랄하게 비판하고 있는데, 결론적으로 그는 제목에서 그대로 드러나는 것처럼 ‘당사자주의’가 사회적 소수자 운동에 있어서 공동환상의 논리일 뿐이라고 말한다. 토요타 마사히로, 「당사자환상론: 혹은 마이너리티 운동에 있어서 공동환상의 논리」, 한국장애인자립생활센터협의회, 『일본 장애인운동에서 배운다: 대담과 논문으로 본 장애운동, 자립생활, 장애문화』, 2005, pp. 58~71.
 그가 주장하는 당사자주의의 문제점은 (서로 연결되어 있는) 다음의 세 가지로 요약해 볼 수 있다.
첫째, 마사히로는 당사자주의가 본질적으로 ‘사회 전체’의 문제인 다양한 사회 이슈들―장애인, 재일한국인․조선인, 외국인, 여성, 피차별부락, 그리고 뇌사장기이식, 오키나와 군사시설 사용허가 등의 문제와 같은―을 ‘그들만의’ 문제인 것처럼 인식하게끔 만드는 환상을 만들어낸다고 본다. 우리가 일상생활에서 흔히 사용하게 되는 ‘관련 당사자들(relevant parties)’라는 표현을 떠올려 본다면, 이 지적이 무엇을 말하고자 함인지 쉽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즉, 장애문제에 있어 장애인들만이 ‘당사자’라는 것은, 장애문제가 장애인들하고만 ‘관련되어’ 있다는 이야기가 되고, 나머지 구성원들 하고는 ‘무관하다는’ 이야기가 된다. 그렇다면 장애문제와 무관한 비장애인들은 당연히 장애문제에 관심을 가질 필요가 없게 된다. 이러한 마사히로의 지적은 필자가 졸저 『당신은 장애를 아는가』(메이데이, 2007, pp. 205~206)에서 제기한 내용과 동일한 맥락에 놓여있다고 할 수 있다. “우리 모두가 장애문제에 관심을 갖고 함께 해야 하는 이유, 또는 장애인 운동의 가치와 의미는 무엇일까? 첫째, 장애인을 둘러싼 다양한 차별과 억압은 ‘장애인’의 문제가 아니라, 경쟁과 효율성의 논리에 병들어 있는 우리 ‘사회’의 문제이기 때문이다(그러한 의미에서 장애인문제라는 표현보다는 장애문제라는 표현이 적절하다). 또한 여성의 문제가 여성 일방의 문제가 아니라, 가부장제를 매개로 한 여성-남성간의 관계의 문제이며, 노동의 문제가 노동자 일방의 문제가 아닌 노동력의 상품화를 매개로 한 노동자-자본가간의 관계의 문제인 것처럼, 장애의 문제는 장애인을 억압하는 사회 구조를 매개로 한 장애인-비장애인간의 ‘관계’ 속에서 존재하는 문제이기 때문이다.”
 앞서 언급되었던 브랜필드는 “‘비장애’인이 변해야만”한다고 합당하게 주장하지만, 자신과 무관하고 그래서 관심을 둘 필요가 없는 문제에 대해서라면 변하고 말고 할 여지도 없게 되는 것이다. 또한 최근 사회적으로 큰 이슈가 되었던 희망버스 투쟁에서도 정리해고와 비정규직 문제에 대한 사회적 연대를 ‘제3자 개입금지’라는 논리―노측과 사측이 당사자니 관련 없는 사람들은 빠져라!―를 통해 억압하려 했던 정부와 공권력의 행태를 본다면, 그리고 제주 해군 기지 문제에 대해 “제주 해군 기지는 제주도민과 해군 간에 해결해야 할 사안이며 정치적 논리에 따라 좌우돼서는 안 된다고”고 강변하는 해군 관계자들의 주장을 접할 때, 하승우, 「구럼비 폭파한 해군, ‘누구를 위한 군대’인가?」, 『프레시안』 2012-03-16 입력기사(http://www.pressian.com/article/article.asp?article_num=50120316130542).
 이러한 당사자의 논리가 지니는 한계와 폐해가 충분히 이해될 수 있을 것이다.
둘째, 동일한 정체성을 지닌 선험적 당사자 집단으로서 장애인을 상정하게 되면, 이중적인 모순 내지는 위험에 빠지고 만다는 것이다. 어떤 문제의 당사자를 표면적으로 관계된 일부 주체들로 한정하는 논리가 일단 적극적으로 인정된다면, 그러한 논리는 계속해서 더 하위의 당사자 집단을 생산해낼 수 있다. 즉, 장애인들이 겪는 구체적 경험과 위치의 공통성에 기초하여 ‘장애인 당사자’라는 집단적 주체를 상정하지만, 장애인 내에서도 장애 유형, 성별, 계급, 학력, 성적 지향, 출신 지역, 연령에 따라 장애인들이 갖는 경험과 위치는 모두 다르다. 결국 개별 사정을 보다 구체적으로 그리고 상세하게 파고들어 생각하면 결국 당사자란 원자화된 개인, 자기 자신 밖에 없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집단적인 사회적 실천을 불가능하게 할 수도 있다. 바로 이러한 모순을 막아내기 위해 당사자주의는 장애인이라는 집단의 동일성을 강조하게 될 수밖에 없으며, 그러다보면 각 개인들이 지닌 차이와 견해를 무시하거나 배제하는 모습을 보이게 된다.
셋째, 일본의 장애인운동이 60년대 말과 70년대에는 ‘장애인해방’이라는 이념과 지향을 가진 운동이었다면, 지금은 당사자운동이라는 논리 하에 배타적 권위주의 집단으로 변질되고 있다는 비판이다. 즉, 장애인 일반의 고통을 양산하는 사회구조를 변혁하기 위한 지향 없이 ‘당사자에 의한 당사자를 위한 당사자들의 권익옹호’를 내세우는 것은 결국 그러한 무이념, 무지향의 운동을 포장하기 위한 앙상한 논리일 뿐이라는 것이다.

 

5. 정체성의 정치가 지닌 한계: 횡단의 정치, 되기의 정치라는 관점에서


당사자주의는 우리가 흔히 이야기하는 ‘정체성의 정치’에 그 기반을 두고 있다. 즉, 비장애인과는 다른 장애인이라는 동일한 정체성을 지닌 이들만이 장애문제를 가장 올바르게 이해할 수 있으며 장애문제의 주체라는 것이다. 정체성의 정치는 표면적으로는 ‘보편성의 정치(politics of university)’와 대립되며 ‘차이의 정치(politics of difference)’에 기반을 두는 것처럼 보일 수 있다. 노동자-민중 내지는 민족-국민이라는 보편성에 대해 일정 집단이 지닌 차이와 고유한 정체성을 주장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본질적으로 정체성의 정치는 그러한 차이의 정치를 경유하여 보편성의 정치에 재포섭된 일종의 ‘하위 보편주의’에 기반을 둔다고 할 수 있는데, 왜냐하면 그러한 하위 집단 구성원 내에서는 다시 일정한 공통성과 보편성을 상정하기 때문이다. 앞에서 마사히로가 제기하고 있는 두 번째 문제점이 나타나는 것은 바로 당사자주의가 지닌 이러한 정체성의 정치라는 측면에서 파악할 수 있다.
이스라엘 출신의 반체제 여성학자로서 이스트런던 대학교 이민․난민․소속 연구소(The Research Centre on Migration, Refugees and Belonging) 소장으로 활동하고 있는 니라 유발-데이비스(Nira Yuval-Davis)는 『젠더와 민족』이라는 저서에서 이러한 보편성의 정치/정체성의 정치가 지닌 한계를 비판하며 ‘횡단의 정치’를 제안하고 있는데, 니라 유발-데이비스, 『젠더와 민족』, 박혜란 옮김, 그린비, 2011, 6장.
 횡단의 정치는 다양한 정체성을 가로지르며 공동의 실천을 가능하게 하는 연대의 정치를 지향한다. 즉, (민족주의에서 전형적으로 나타나는 것처럼) 모든 개인들을 하나의 전체/정체성으로 단정하는 보편주의를 지양하고, 그러면서도 특정 개인 또는 집단의 이익과 주도권을 주장하는 특수주의의 입장을 고집하지도 않으면서, 공통의 주제나 문제 앞에서 대화적 방법을 통해 함께 모인 주체들의 이익과 열망을 아우를 수 있는 합의점을 찾아내는 정치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횡단의 정치를 조금 더 설명해보기로 하자.
기본적으로 횡단의 정치는 소위 모더니즘/포스트모더니즘 논쟁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는 보편주의/상대주의 이분법에 대한 대안을 목표로 한다. 또한 계급, 성별, 장애, 학력, 성적 지향, 출신 지역, 연령 등의 무수히 많은 차이가 교차함에 따라 사람들이 모두 다르다면, 그러한 개인들이 어떻게 그리고 누구와 함께 일해야 하는가에 대한 답을 제공하는 것 역시 목표이다. 스튜어트 홀(Stuart Hall)이 이야기했던 것처럼 “모든 정체성은 차이와 교차하며 구성된다”고 했을 때, Stuart Hall, “Minimal Selves”, eds. Homi Bhabha et al., Identity: The Real Me, ICA Document 6, London: Institute of Contemporary Arts, p. 44.
 횡단의 정치는 페미니즘 정치나 장애의 정치와 같은 모든 소수자 대중운동 자체를 연합정치의 한 형태로 봐야 한다고 사고하며, 우리가 ‘누구’인가가 아닌 우리가 성취하고자 하는 것이 ‘무엇’인가 하는 측면에서, 안과 밖의 정치적 ‘단위’들과 이러한 연합의 경계를 설정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즉, 횡단의 정치에서 연합의 경계들은 메신저보다는 메시지에 의해 결정된다(위에서 언급되었던 더킷이 기고문에서 자신이 장애인인지 비장애인인지를 밝히지 않은 것 역시, 메신저가 누군인지가 아니라 메시지가 무엇인지로 판단되어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횡단의 정치에서는 위치의 고정성보다는 대화가 세력을 갖춘 지식의 기초가 된다. 집단 형성의 경계를 결정하는 것은 본질주의적인 정체성의 차이가 아니라 구체적이고 물질적인 정치현실이다. 이러한 경계의 설정에 있어 핵심적인 개념 혹은 방법은 ‘뿌리내리기(rooting)’와 ‘옮기기(shifting)’라고 할 수 있다. 대화의  참여자들은 각기 자신의 멤버십 및 정체성 속에 ‘뿌리내리기’를 하지만 동시에 다른 멤버십 및 정체성을 지닌 주체들과의 교류와 공감을 위해 ‘옮기기’를 시도한다. 이러한 형식의 대화를 추구하는 것이 ‘횡단주의(transveralism)’다. 즉, 횡단주의는 ‘동질적인 출발점’을 가정함으로써 포함이 아닌 배제로 끝나는 ‘보편주의’, 그리고 ‘차별적인 출발점’으로 인해 어떤 공통된 이해나 진정한 대화가 전혀 가능하지 않다고 가정하는 ‘상대주의’를 극복하기 위한 방법론이자 철학이라고 할 수 있다.
횡단적 전망의 발전에 중요한 두 가지가 있다. 첫째, 옮기기 과정이 자기중심을 부정하거나 포기하는 것이어서는 안 된다. 이는 자신의 뿌리내리기와 일련의 가치들을 잃는 것이기 때문이다. 둘째, 옮기기 과정이 ‘타자’를 동질화하려는 것이어서는 안 된다. 횡단에서의 동행은 다른 집단의 구성원들과 일괄적으로 함께하는 것이 아니라, 뿌리를 달리 내리면서도 자신과 양립할 수 있는 가치와 목표를 공유하는 이들과 함께해야 한다.
이러한 ‘횡단의 정치’는 장애인 당사자주의를 전면적으로 부정하지 않으면서도('뿌리내리기'라는 견지에서), 그 한계지점을 유효하게 비판할 수 있는('옮기기'의 부재라는 견지에서) 개념적 도구가 되어 줄 수 있다. 그리고 차이의 정치에 근거하면서도, ‘사람은 모두 다르다’라는 입장이 개별자들로의 분해로 귀결되지 않는다는 점에서, 즉 집단적 정치실천을 위한 ‘단위’의 횡단적 구성을 사고할 수 있게 해준다는 점에서 상당한 장점과 매력을 지닌다. 자기중심성을 유지하는 가운데, 대화와 공감에 기반을 두고, 구체적인 정세에 따라 공동의 목표를 지향하는 (연합적) 단위의 유연한 재구성을 지향하는 것이 횡단의 정치이며, 이는 ‘되기의 정치(politics of becoming)’와도 상당한 친연성을 갖는다.
‘되기의 정치’는 잘 알려져 있다시피 들뢰즈(Gilles Deleuze)와 가타리(Fe'lix Guattari)가 이야기하는 다수자의 ‘소수자 되기’―남성의 여성 되기, 백인의 흑인 되기, 어른의 아이 되기, 비장애인의 장애인 되기 등―에 그 기반을 둔 개념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다수자/소수자의 분할선은 다양한 방식으로 ‘교차’되어 있기 때문에 차이를 가로지르는 실천적 활동인 이러한 ‘되기’는 당연히 소수자 집단 내에서도, 더 나아가 소수자 개체 내에서도 이루어지는 것으로 이해될 수 있다. 즉, ①다수자의 소수자 되기뿐만이 아니라 ②소수자A의 소수자B 되기(장애인의 이주민 되기) ③장애인A의 장애인B 되기(지체장애인의 지적장애인 되기) ④장애인A의 장애인A' 되기(즉자적-생물학적 장애인에서 대자적-의식적 장애인 되기, 즉 지배적 이데올로기에 포섭된 다수자적 장애인에서 사회적 억압을 인식하고 저항하는 소수자적 장애인 되기) 등이 모두 ‘되기의 정치’라는 맥락 내에서 이해될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횡단의 정치와 되기의 정치의 입장에서 보자면 장애인 당사자주의가 갖는 한계는 매우 명확하다. 즉 그것은 공동의 실천을 위한 주체와 단위의 경계들을 ‘메시지’가 아닌 ‘메신저’에 의해 선험적으로 결정해 버리는 우를 범하고 있는 것이다. 또한 페미니스트 정희진의 통찰을 빌리자면, 정희진, 『페미니즘의 도전』, 교양인, 2005, p. 153.
 장애인이 가진 다양한 차이들, 인간이 지닌 다중적 정체성에도 불구하고 한 인간의 정체성을 장애인으로 환원하는 것이 바로 장애인차별주의라고 했을 때, 이러한 환원주의가 전도된 형태로 발현된 것이라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6. 결론을 대신하여: 당사자주의의 올바른 위상과 한국적 현실


비록 정체성의 정치가 갖는 한계를 명료하게 인식하고 그것을 극복하는 형태로 발현되어야 하겠지만, 자기대표권이나 자기결정권의 확장된 적용으로서의 당사자주의란 장애인운동만이 아니라 모든 대중운동에 있어 밑바탕이 되는 기본적 원리들 중 하나일 것이다. 그러므로 한자연 전 상임대표였던 고관철 씨가 주장하듯이 장애인운동만이 아니라 학생운동, 노동운동, 농민운동, 여성운동, 청소년운동, 성적소수자운동 등 모든 대중운동 영역에서 그러한 대중들 스스로가 자기대표권을 갖는다는 것은 당연하다. 그러나 그 어떤 대중운동도 당사자주의를 운동의 이념으로 내세우지는 않는다. 그 이유는 간단한데, 왜냐하면 그것은 어떤 운동이 무엇을 하고자 하며 어디로 나아가고자 하는가를 드러내주는, 즉 지향과 내용을 담보하는 이념적 수준의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자기대표권으로서의 당사자주의가 운동의 출발점에 놓여있는 기본적 원리들 중 하나라는 원래의 위상을 이탈하여 운동의 지향과 이념으로 내세워지는 순간, 그것은 (당사자주의의 주창자들이 잘 쓰는 표현을 빌리자면) 필연적으로 유사 당사자주의로 전환되고 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른 대중운동과 달리 장애인운동에서는 당사자주의가 특별히 운동의 이념이 될 수 있고 되어야 하는 이유를 김대성 씨는 앞서 언급되었던 글에서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조금 길지만 옮겨와 보기로 하자.

사회적으로 소외된 많은 사람들 중에 왜 장애인들만 당사자주의가 문제가 될까? 다른 사회적 약자들 사이에서는 당사자주의라는 말이 필요가 없는데 왜 장애인들은 이것이 문제가 되는지? 왜 장애인들은 당사자주의를 외쳐야 하는가? (…) 장애인들의 경우에는 서비스를 제공받는 사람이라는 점에서 여성과 다른 차원의 사회적 관계가 형성된다. 가령 여성들의 경우에는 사회적 관계들이 형성되어나가면서 여성의 권익향상이 큰 무리 없이 진전되어나가는데, 장애인의 경우는 사회복지사 등 재활전문가나 정책 연구 등 학술가라는 서비스 공급자 중심의 사회적 관계가 형성되었기 때문이다.
90년대를 수요자 측면에서 보면 무엇이 달라졌는지 피부로 다가오는 것이 없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확실한 이념적 대응도 빈약하고 체계화시키지도 못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러나 공급자 측면에서 생각하면 그렇지 않을 수 있다. 프로그램이 많아지고 다양해졌으며 전문가 숫자도 많아졌다. 수요자 측면에서는 별로 성과가 없고 빈약하다는 느낌이 남는 이유는 질과 양의 두 축이 불균형한 채 한쪽만이 증가하였기 때문이다. 여기에 문제의 핵심이 있는데, 공급자가 제공하는 바가 늘어나면서 수요자도 만족할 수 있다면 당사자주의가 필요가 없다. 뭔가를 제공하는 것에 선행하는 판단이 미리 주어지지 않으면 문제가 되지 않는다, 그러나 우리 장애계는 제공자 패러다임이 지배적이다. 그래서 속된 말로 입맛에 맡느냐, 내가 요청한 것이냐, 잘되었느냐, 다른 것은 없는가, 왜 내가 선택하지 못하는가 등등의 문제제기가 나오게 된 것이다. 90년대는 상당히 공급자주의 관점에서 가분수형태로 커진 10년이었기에 당사자주의가 필요한 것이다. 김대성, 「장애인 당사자주의 운동의 참여와 연대정신」, pp. 177~178. (강조는 인용자)


즉, 장애인복지 전달 체계와 공급자적 위치를 비장애인과 전문가들이 독점하고 있었고, 그로인해 서비스 수요자인 장애인들의 복지가 실질적으로 증진되지 않았다는 비판인데, 장애인 당사자주의가 필요한 이유로 (좀 생뚱맞아 보이지만) 이 지점이 중요하게 이야기되는 것은 바로 여기에서부터 한국DPI가 지향하는 운동의 전략과 목표가 나오기 때문이다. 앞서 언급된 당사자주의에 대한 정의에서도 “장애인의 정치적 연대를 통해… 서비스 공급체계의 불평등한 권력관계를 비판․견제함으로써”라는 표현이 들어가 있는 것에서 나타나듯, 이들의 말하는 당사자주의의 운동 목표는 RI로 상징되는 비장애인 세력으로부터 복지전달체계와 권력을 탈환해오는 것이다. 활동보조서비스가 처음 시작될 때, 그 중계 기관을 장애인자립생활센터가 독점해야 한다고 주장했던 것도 바로 이러한 인식과 전략에 기초한다고 할 수 있다. 김도현, 「전달체계 독점은 운동의 전략이 될 수 없다」, 『에이블뉴스』2006-08-09 입력기사(http://www.ablenews.co.kr/News/NewsContent.aspx?CategoryCode=0009&NewsCode=10803).
 윤삼호 소장은 유형별 장애인 단체의 형태를 띤 사이비 당사자주의가 “용감하게도 ‘장애인 단체가 복지관을 많이 운영하는 것이 바로 당사자주의의 실천이다’는 생뚱맞은 주장을 하기도”한다고 시니컬하게 비판하지만, 윤삼호, 「장애와 정치」, p. 73.
 한국DPI의 운동 전략과 목표 역시 이와 본질적으로 다른 노선 내에 있지 않은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전달체계 및 권력의 탈환을 위해, 이들이 말하는 정치세력화는 새누리당에서부터 통합진보당에 이르기까지 좌우를 가리지 않는다. 제19대 총선을 앞두고 장총련과 한국장총을 중심으로 한 주류 장애계는 ‘2012장애인총선연대(약칭 총선연대)’를 구성하였으며, 장애계 인사들의 신청을 받은 후 내부 추천위원회의 심사 및 배심원단 투표를 거쳐 각 당에 10인 이내의 비례대표 후보를 추천하는 활동을 진행하였다. 한국DPI 채종걸 회장 역시 이 절차를 거쳐 새누리당 비례대표 후보로 등록을 하게 된다. 그러나 장총련 상임대표인 지장협 김정록 회장이 이러한 과정과는 별도로 새누리당 비례대표 후보에 지원하였고, 결국 총선연대 추천 후보들을 제치고 새누리당 비례대표 2번을 배정받아 국회 입성을 앞두고 있다. 마찬가지로 한국장총의 상임대표인 한시련 최동익 회장 역시 총선연대의 추천 과정을 거치지 않고 독자적으로 민주통합당 비례대표 후보에 지원하여 비례대표 2번을 배정받았다. 이 일로 인해 총선연대는 한바탕 내분에 휩싸이며 조직의 대표에 대한 비난 성명을 발표하고 제재 조치를 강구하는 코미디와 같은 상황을 연출하고 만다. 한편 전장연은 총선연대의 전신인 ‘2012총선․대선장애인공약개발연대’에는 참여하였으나 총선연대의 비례대표 추천 활동 자체가 정치권 줄서기이자 공천장사라고 비판하며 탈퇴하였고, ‘99%장애민중선거연대’를 구성하여 독자적인 투쟁 활동을 전개하였다.
 이념이나 세계관과는 관계없이 복지전달체계를 장악하기 위해서라면 어떠한 현실 권력과의 결합도 가능한데, 이는 그들이 이 세계를 ‘비장애인 세계’와 ‘장애인 세계’라는 이분법적 관점에 근거해서 바라보며, 장애인 당사자의 이익 앞에 다른 모든 것은 부차적이라 여기기 때문이다. 또한 복지전달체계를 탈환하여 복지부의 사업 파트너가 되기 위해서는 필연적으로 정부와 적대적인 관계를 형성할 수 없기에, 이들의 대중투쟁이란 하나의 요식 행위로 전락하고 만다. 과연 이러한 식의 운동 전략과 정치세력화가 진정한 장애해방을, 그러한 장애해방을 위한 운동의 지속을 가능하게 해 줄 수 있는가? 당사자주의의 올바른 위상을 되찾아주는 것과 더불어, 우리에게 판단이 필요한 것은 아마도 바로 이 지점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